나는 TV광(狂)이다. 한 때 나와 채널 경쟁을 했던 큰 아이가 “아빠가 아줌마야?” 할 정도로 드라마광이다. 지금도 6개월에 한 두 개 쯤 꽂히는 드라마에는 ‘본방사수’를 할 정도인데 요즘은 네 식구가 대충 의견 일치를 보기 때문에 채널 싸움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성균관 스캔들>, <시크릿 가든>, <최고의 사랑>이 그랬고 요즘 유력한 후보는 <무사 백동수>다). 9시 뉴스 시간에 집에 있을 땐 예외 없이 EBS의 <세계 테마 기행>을 보며, 늦은 밤 각 방송사의 다큐도 벅찬 가슴으로, 가끔 눈물까지 흘리며 본다. 요즘 웬만큼 바쁜 일 없으면 집이건, 식당이건 보는 프로그램은 MBC <우리들의 일밤> ‘나는 가수다’이다. 나는 술 취하면 거의 매번 연구원들을 노래방으로 끌고 가지만 실력은 가끔 빵점이 나올 정도로 형편없다. 하지만 ‘나가수’에서 누가 일등할지, 그리고 누가 꼴등해서 탈락할지를 맞출 정도의 눈치는 있다(어쩌면 우리 청중평가단은 다 나만큼 음치일지도 모른다^^). 그 엉성한 감각에 비춰 볼 때 박정현, YB, 그리고 아마도 김범수는 영원히 탈락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박정현은 금주에 그랬듯, 모든 장르의 도전을 즐기는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너무 많이 나와 지겹다”는 이유로 외면당할 이유도 없을 듯 하다. 한편 옥주현은 떨어질 때가 됐다는 느낌이 강했는데 청중평가단은 역시 냉혹했고, 마치 아이돌 출신은 여기 오면 안 된다는 나름의 고집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가 임재범과 한 무대에 서는 건 ‘나가수’가 아니었다면 상상도 못 했을 것이며, 이제 탈락했다 하더라도 그의 노래 인생은 서너 계단을 단숨에 올라섰을 것이다. 이런 부질없는 생각을 하다 문득 왜 지식인들 사이에선 이런 아름다운 무대가 없는 걸까, 내가 그 무대에 오른다면 어떤 모습일까, 매년 열리는 각종 학술대회는 왜 이런 긴장감이 전혀 없이 그저 때운다는 느낌이 드는 걸까, 아니 지상에서의 간접 경쟁에서 조차 왜 이처럼 목숨을 건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그저 지엽말단의 실수에만 치명적인 칼날을 들이미는 걸까, TV 토론에서 왜 나는 상대의 무지와 옹고집에 방송 중에도 한숨을 쉬는 걸까(아마 상대도 나에게 그런 생각을 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서로 칼날 위의 경쟁을 하면서도, 심지어 아주 깊은 속으론 내 음악이 더 낫다고 생각하면서도, 방금 드러난 다른 이들의 실력에 언제나 공감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왜 전문가 집단 사이에선 벌어지지 않는 걸까. ‘나가수’에선 분명히 이룬 ‘화이부동’이 왜 지식인 사회에선 불가능할까. 지금이야 말로 춘추전국시대처럼 제자백가가 백화제방 할 시기이다. ‘신자유주의’라는 한 시대가 저물고 그 다음 시대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때, 지식인들은 자신의 전문 영역을 넘어 다가올 시대에 대해 큰 그림을 펼쳐야 한다. 미래이기에 증명할 수 없지만, 예술가처럼 감각으로 미래를 예감하도록 할 능력은 없지만 지금이야말로 좁디 좁은 자신의 전문 영역을 넘어 전체 사회와 자연의 미래에 대해 예언할 때이다. 만일 우리 사회가 근시안과 좁은 이기심 때문에 지속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다면, 그런데도 오로지 몇몇 정치인의 행보에 우리의 미래가 걸려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나를 포함한 모든 지식인들은 직무태만이라는 역사적 중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의료인들이 히포크라테스나 화타의 삶을 잊고, 교수와 교사가 공맹이나 권정생의 진정을 잊고 모두 각자의 전문가 울타리 안에서 적당한 보수를 누리고 있다면, 이강택 전국언론노조 위원장의 말대로 “지금은 언론의 위기가 아니라 언론인의 위기”일 정도로 언론의 공공성을 잊었다면 그 어찌 지식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도대체 시청률이 거의 유일한 잣대가 되고, 심지어 방송사주와 자신의 정치적 행로가 방송의 내용을 규정한다면 그런 방송인이 과연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과연 조선시대 깐깐한 선비의 기준에 도달한 지식인이 몇 명이나 될까? 봉건시대의 선비들은 후대에 자신이 ‘소인’이라고 역사에 기록되는 것 만큼은, 그래서 후손이 부끄러워 하는 것 만큼은 걱정했는데 과연 지금은 그 무엇이 우리들을 규율하고 있는 걸까? “나는 지식인이다”라고 외치며 광장에서 우리의 미래에 관해 모두와 함께 토론할 수 있는 사람이 몇명이나 될까? 진보와 보수 모두 지식인으로서 지금 ‘나는 가수다’의 그들처럼 대중 앞에 나서서 그야말로 실력으로 경쟁해야 할 때가 된 게 아닐까? 적어도 20-30년은 지속될 대혼란이 우리 머리 위에 엄습해 있는데 이 시대의 지식인은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이 글은 PD저널에도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