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1. 1988~1996년 소득 상승과 내수시장 확대2. 내수를 기반으로 재벌 대기업이 성장하다. 3. 재벌 대기업 성장과 내수 확장의 선순환은 외환위기로 종결되다.[본문]총수와 일가 친인척으로 소유체제가 구성된 한국식의 재벌(財閥, Chaebol)역사를 60년대부터 잡는다고 했을 때, 50여 년 동안 한국의 재벌 대기업들이 온갖 문제점을 안고 있고 다양한 비판을 받아왔음에 불구하고 경제 성장과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일정하게 이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얼마 전까지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발전도상국이 선진국을 추격하려면 국가의 적극적 자원 재분배 개입과 함께 일정한 규모를 지닌 대기업 집단이 대규모 자본투자가 소요되는 중화학 공업과 첨단 산업에 모험을 감수하고 과감히 투자해야 한다는 주장이 역사적 경험으로 뒷받침되기도 했다. 재벌 대기업과 ‘사회적 대타협’을 하여 한국을 복지국가로 발전시키자는 최근까지의 일각의 주장도 재벌 대기업 집단이 이러한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전제한 것이기도 했다. 이른바 한국형 경제발전모델이 그것이고 한국은 국가와 대기업 주도의 모범적인 추격모델로 인정받기도 했다. 한국의 재벌이 정권이 바뀔 때 마다 개혁의 대상이 되거나 총수가 검찰에 소환되는 일이 반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개혁이 좌절되고 총수는 경영일선으로 복귀할 수 있었던 명분이기도 했다. 더욱이 한 때 재벌 대기업 집단의 과감한 투자와 고용 -> 임금과 국민 소득 상승 -> 구매력 있는 중산층 확대 -> 내수시장 규모 확대로 이어지는 일정한 선순환 구조가 작동하여 한국경제의 체질이 개선될 조짐을 보이기도 했다. 바로 1988년에서 1996년 시기 동안이었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를 겪고 그 이후 재벌 대기업 집단의 변신은 정 반대의 길을 걷게 된다. 사실상 ‘대기업이 주도하는 한국형 발전 모델’이 사실상 종료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1990년대 전반기에 재벌 대기업의 성장과 국민 소득 향상이 맞물리면서 내수시장 확대를 가져오게 되었고 그것이 한국경제 구조로 정착하지 못한 채 소멸되어 버리게 되었을까. 최근 30년 동안의 우리 경제역사와 재벌 역사를 나눈다면 큰 두 번의 분기점은 1987년과 1997년이 될 것이다. 우리 경제에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이명박 정부 집권이 또 하나의 분기점이 될 수도 있는데 아직 판단을 미뤄두기로 하자. 1. 1988~1996년 소득 상승과 내수시장 확대1980년대 이후 한국경제에서 첫 번째 분기점은 1987년 전후라고 할 수 있다. 1985년 선진국들의 환율조정 회의였던 플라자 합의 이후 1986~1988년 사이에 ‘저금리, 저달러, 저유가’라고 하는 3저 호황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의 분위기가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7-8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노동조합 결성이 급격히 확대되고 임금상승 요구가 높아지게 된다. 이를 시발점으로 한국경제는 1988~1996년 외환위기 직전까지 그 이전이나 이후와는 다른 거시경제 지표들을 만들어 가게 된다. 즉, 이 시기는 한국경제의 전 역사적 시기를 통틀어 부정적인 측면이 최소화되고 자본주의 틀 안에서나마 긍정적인 모습들이 확대되어갔던 시기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 노동자 임금 상승과 소득 상승이 가장 빠르게 증가했던 시기▶ 노동소득 분배율이 커지면서 소득 불평등 정도가 가장 완화되었던 시기▶ 국민들의 저축률이 높게 형성되었던 시기▶ 부동산 시장, 주식 시장 등 자산시장이 큰 변동 없이 일정하게 유지되었던 시기▶ 국민 소득 향상에 기초한 내수시장이 가장 팽창했던 시기1) 노동자 임금 상승과 소득상승이 가장 빠르게 증가했던 시기우선 전체 경제 성장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 시기는 유래 없는 노사 분규와 임금인상 요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연 평균 실질 경제성장률이 8.3%였을 정도로 상당히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2001~2010년 평균 경제성장률 4.2%의 거의 두 배에 해당하는 수치에 해당한다. 지금과 비교하면 안정적인 고성장 기조가 이어졌다고 볼 수 있으며 외환위기 이후의 저성장 국면과 확실히 비교된다.앞서 언급한 것처럼 고성장 기조아래 노동자 대투쟁의 연장선에서 역사상 노동조합 조직률이 가장 높았고 조합원 숫자도 가장 많았던 시기다. 1989년에 조직률 20%, 조합원 수자 200만에 육박하는 정점을 찍었으며 외환위기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하긴 했으나 현재의 조직률 10% 수준보다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조직률을 유지했던 것을 알 수 있다.노동운동 활성화가 경제 성장을 추락시키지 않는다는 가장 명백한 증거를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고성장이 이어지면서 일자리는 매년 50만개 전후로 늘어나게 된다. 이 시기는 2000년대와 비교해도 평균적으로 신규 취업자 수 증가가 상당히 높은 수준에서 유지되었던 시기이고 당연히 고용율(취업자수/ 생산가능인구)도 매우 가파르게 상승하여 1994년에서 1996년 기간 동안에는 역사상 최고치인 61%에 근접하기도 했다. 물론 외환위기 이후에는 고용율이 급격히 하락했고 거의 60%밑을 맴돌았으며 최근 경제위기로 인해 더 추락하게 된다.고성장 기조 유지, 노동조합 활성화, 취업자 수 증가를 배경으로 노동자 임금과 가계의 소득은 안정적으로 높은 수준의 상승률을 보이며 올라가게 되었다. 한국은행이 집계하고 있는 명목상 피용자 보수가 매년 15~25%의 증가율을 보이고 있는 점이 이를 입증한다.(그림 참조) 물론 임금상승에 따라 기업의 생산원가나 매출액에서 차지하는 인건비 비중도 2000년대 보다 훨씬 높은 수준을 기록하게 되지만(이 시기는 전 산업 기준 매출액 대비 인건비 비중이 12~14%, 2000년대에는 10%전후) 그렇다고 기업들이 적자행진을 했던 것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1998~1996년 시기는 노동조합운동 활성화 – 취업자 수 증가 – 고용률 증가 – 임금 상승이 비교적 높은 수준에서 안정적으로 이어진 시기라고 할 수 있고, 이는 2000년대의 노동조합운동 약화 – 취업자 수 증가세 약화 – 고용률 하락 – 실질임금 정체와 여러모로 비교된다. 아울러 이 시기는 노동유연화가 아직 사회적으로 확대되기 이전 시기여서 비정규직 만연과 같은 고용불안도 상대적으로 적었던 시기다. 2) 노동소득 분배율이 커지면서 소득 불평등 정도가 가장 완화되었던 시기이 시기는 노동자의 임금이 상승하고 기업 이익에서 차지하는 임금 몫이 증가함에 따라 노동소득 분배율이 가장 빠른 속도로 개선되었고 절대 분배율 값도 역사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임금 노동자의 절대 숫자가 계속 늘어났던 것을 고려하여 재계산한 조정 노동소득 분배율지표로 보면 2000년대와의 차이가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자영업자 소득 감소까지를 감안한 지표를 보면 격차는 더 커진다.당연하겠지만 노동소득 분배율이 개선되면서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지표인 지니계수도 1990년대 초반에는 떨어지다가 이후 완만한 상승을 보이기는 했지만 2000년대에 비교하면 매우 낮은 수준을 지속했다.(그림 참조) 결국 이 시기는 상대적으로 불평등 정도가 완화되고 중산층이 두터워져갔던 시기다. 2011년 현재 시점에서 중요한 사회목표가 ‘불평등 완화, 두터운 중산층 만들기’라면 그 목표에 가장 근접했던 시기라고도 할 수 있다. 3) 국민들의 저축률이 높게 형성되었던 시기지금 우리사회를 불안하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은 800조 원이 넘고 있는 가계 부채이다. 동시에 2010년 기준 3.9%에 불과한 개인 순저축률이다. 그러나 1988~1996년 상황은 지금과 정반대였다. 이 시기는 소득 상승에 힘입어 가계의 저축률이 15%~20%사이를 유지하면서 기업 저축률을 크게 상회했던 시기였다. 반면 가계 부채는 가계 신용잔액 기준으로 외환위기 이전인 1996년 까지도 175조 원 정도로 2010년 가계 신용 잔액 800조 원의 1/5에 불과했다.2000년대 접어들면서도 기업 저축은 지속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 저축률은 극적으로 떨어져 2010년 기준 개인 순저축률이 3.9%에 불과한 수준이 되었던 것과 극적으로 대비된다. 적은 저축에 높은 부채를 안고 살아가는 지금의 생활과 높은 저축에 낮은 부채밖에 없었던 당시의 생활은 여러모로 상상이 안 될 정도로 비교가 된다 할 것이다. 반면 기업들은 외환위기 이후 높은 부채비율을 축소하고 내부 현금자산을 늘리면서 글로벌 경제위기 상황에서도 공격적으로 대처해왔다. 높은 저축은 경기불황과 같은 경기 변동시기에 소득감소 충격을 완화시키고 소비를 유지시키는 작용을 하지만, 높은 부채는 소득 감소 충격을 배가 시키고 부채 상환압력을 가중시켜 소비축소를 오히려 가속화시키는 부작용이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4) 부동산 시장, 주식 시장 등 자산시장이 큰 변동 없이 일정하게 유지되었던 시기안정적이고 높은 고용이 유지되는 가운데 소득이 향상되고 저축이 늘어났으며 불평등 정도가 완화되었다면 부동산 시장과 주식시장 등 자산시장 동향은 어땠을까. 비록 1990년대 초반까지 부동산과 주식시장의 과열이 보이기는 했지만 대체로 1990년대 상반기에는 부동산 매매 시장은 큰 상승 없이 일정한 가격 기조를 유지했다. 전세 값이 완만하게 상승하는 정도였다.반면 외환위기 이후 한국경제는 비록 미국처럼 거품이 꺼지면서 경제 시스템이 붕괴되는 사태로 번지지는 않았지만 자산시장의 거품이 형성되던 시기였다. 외환위기 이후 부동산 시장이 1999~2003년, 2005~2006년 두 번에 걸쳐서 큰 폭으로 상승한 결과 서울지역 기준 아파트 가격이 평균적으로 두 배 이상 올랐던 것이 이를 입증해준다. 1999년 1월 서울 아파트 매매가격 지수가 35.7 이었다면 2010년 말 기준 지수는 100.3이었다.부동산 시장과 함께 주식시장도 1980년대 말과 1993년 전후 두 차례에 걸쳐 폭등하는 현상을 보이기는 했지만 대체로 종합주가지수 기준 600~1000 사이를 오가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2004~2008년 금융위기 시기까지 주가는 빠른 속도로 증가하여 2000포인트를 돌파한 바가 있고 글로벌 금융위기 과정에서 큰 폭의 변동성을 보인바 있다. 사실 외환위기 이후 시기 한국경제에서 새롭게 나타난 가장 차별적인 현상이라고 한다면 경제의 금융화가 급격히 진행되고 금융공급에 의한 자산 거품이 극심하게 형성되었던 시기다. 가계 부채가 동반되었음은 물론이다. 2011년 현재까지 이 거품은 제대로 꺼지지 않은 채 불안하게 유지되고 있는 중이다. 결론적으로 1990년대 상반기 시기는 실물적인 근로 소득의 안정적 상승과 함께 자산시장 변동성이 2000년대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안정되었던 시기라고 평가할 수 있다. 5) 국민 소득 향상에 기초한 내수시장이 가장 팽창했던 시기이 시기 국민들의 소득과 저축이 상승했던 결과는 전체 거시경제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민간 소비지출 증가와 내수확대다. 이 시기는 상당한 정도로 수출 보다는 민간 소비지출에 의한 내수의 성장 기여도가 높았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외환위기 이후에는 2001년 IT버블 붕괴로 인한 세계 경제 침체와 2009년 글로벌 경제위기 상황 국면만을 제외한다면, 내수 보다는 압도적으로 수출의 성장 기여도가 높았다고 할 수 있다.1997년 이후 민간 소비는 외환위기, 2003년 신용카드 대란, 2009년 경제위기로 인해 세 번의 심각한 추락을 경험했을 뿐 아니라 1999~2002년 신용카드 거품으로 부채에 의한 과소비시기를 뺀다면 전반적으로 민간소비는 수출에 비해 매우 낮은 수준을 지속했다. 재벌 대기업은 1990년대 팽창하는 내수에 의지해 성장을 해 왔지만, 2000년대부터는 낮은 국내 민간 소비가 아니라 수출과 해외생산 확대를 타면서 성장해갔고 이것이 국민경제와 재벌 대기업의 연관 고리가 약화되는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국내 민간 소비가 팽창하자 기업들이 국내 설비투자도 평균적으로 높은 수준으로 확대하게 된다. 1988~1996년 동안 평균 설비투자 증가율은 13.1%였다는 것이 공식 통계이다. 이는 2000년대 이후에는 다르게 나타나는데 2001~2010년 동안에는 3.8%에 불과했다.물론 이 시기 후반기인 1993년 이후 국내 기업의 해외투자도 점차로 늘어난다. 그러나 그 규모는 2000년대 국내 대기업들의 해외 진출 러시와 해외생산기지 구축으로 폭발적으로 팽창한 해외 투자에 비하면 규모가 크다고 할 수 없다.2. 내수를 기반으로 재벌 대기업이 성장하다. 국민의 소득 상승 -> 구매력 상승 ->민간소비지출 증가 -> 내수시장 팽창은 국내 재벌 대기업들에게는 엄청난 도약의 계기로 작용을 한다. 확대된 내수시장에 대한 지배력을 기반으로 재벌 계열의 주요 대기업들은 활발하게 자본축적과 기술축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게 되며, 그 결과 1980년대까지의 조립가공기업에서 벗어나 자동차, 반도체, 전자 등에서 일정하게 자체 기술력을 확보하면서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으로 이동했고 섬유 등 경공업 중심의 산업구조는 첨단 산업 방향으로 전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자동차 산업만 보아도 명확한 것인데, 1980년대 이후 한국 자동차 산업에서 내수가 수출을 앞질렀던 시기가 바로 이 시기이다. 2000년대 수출이 한국 자동차 산업을 선도하던 것과 확연히 비교되고 2000년대 후반에 아예 수출도 아니고 해외 생산이 국내생산-수출과 맞먹고 있는 상황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특히 2000년대 이후 자동차 산업의 경우 국내 생산에 의한 내수 판매와 수출 보다는 해외생산에 의한 현지판매가 대폭적으로 증가했는데, 2010년 기준 국내 자동차 업계의 해외 생산이 260만 대를 넘어서게 되었다. 이 역시 2000년대에 재벌 대기업이 국내 경제와 단절된 성장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 지표다.특히 이 시기는 민주화 분위기에 편승하여 노태우-김영삼 정부를 거치면서 재벌 대기업들이 서서히 정부권력의 통제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고 권력에 대하여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1992년 재계 총수였던 정주영 현대 회장은 아예 대통령에 출마하여 파란을 일으킨 경험이 있다. 노동자 대투쟁으로 인상된 임금이 기반이 되어 내수시장에서 자본과 기술을 축적하고 민주화 분위기에 편승하여 정부 권력으로부터 독립을 시작했던 것이 한국 재벌 대기업 집단이었다. 요약하면, 우리나라 재벌 대기업들은 국민경제에서 고용과 소득 저축이 동반 상승하면서 조성된 ‘내수 시장 확대’ 시기인 1988~1996년 동안 상대적으로 보호받던 국내 시장이 팽창하자 이에 대한 독과점적 지배력을 근간으로 자본과 기술을 축적하면서 글로벌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때 이르게 ‘세계 경영’을 내걸면서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려 시도했던 대우 그룹은 이후 와해되었지만.3. 재벌 대기업 성장과 내수 확장의 선순환은 외환위기로 종결되다.물론 1988~1996년 고용과 소득 저축이 동반 상승하면서 중산층이 두터워졌다는 것은 2000년대와 상대적으로 비교하여 그렇다는 것이지 이 시기에 경제 불평등이나 저임금이 없고, 노동 기본권 등이 지켜졌다는 얘기는 전혀 아니다. 사회 부조리나 재벌의 불법, 탈법 행위가 없었다는 얘기가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 보다 더 중요하게 짚어야 할 역사적 사실이 하나 더 있다. 이 시기 중요 특징이 내수시장 확대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이 시기 중심 특징은 아니더라도 또 다른 매우 중대한 변화가 물 밑에서 시작된다. 바로 경제의 신자유주의화이다. 특히 김영삼 정부 들어서 한쪽에서는 금융실명제(1994), 부동산실명제(1995), 공평과세 등 경제개혁을 추진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1994년 12월 ‘세계화’ 선언을 기점으로 1996년 OECD가입을 위해 미국이 요구한 금융 자유화를 서두르게 된다. 그 정점에 1995년 8월 15개 투자 금융사를 종금사로 전환시키고 이들에게 해외차입을 허용해주는 등 금융 규제가 풀린 사실이 있다.막 시작된 금융개방 환경은 내수를 기반으로 급성장한 재벌 대기업의 팽창 욕구와 결합하여 외환위기라는 한국경제사에서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외환위기 원인이 재벌의 부실 경영 때문인가 아니면 신자유주의 금융 자유화 때문인가 하는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확실한 것은 이 두 가지가 결합되었다는 것이다. 내수시장 확대를 배경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재벌 대기업들은 대우의 ‘세계경영’구호에서 알 수 있듯이 해외로 팽창을 서두르게 된다. 이를 위해 과잉 차입, 과잉 투자를 감행하는데 이 때 적지 않은 자금줄로 작용한 것이 바로 종금사를 포함한 금융기관들이 해외에서 저리로 차입해온 단기 외채였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단기 외채는 급증했고 한보, 기아 등 유력 기업들이 흔들리자 종금사 등 금융사들의 부실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97년 태국에서 시작된 아시아 외환위기로 인해 해외 자본의 자금 상환 압박이 아시아 전역에 번지자 곧바로 한국도 외환위기로 빠져들게 된 것이다. “외환위기 이전 자본 자유화의 주요한 압력은 국내 재벌과 미국 정부로부터 기인했으며 정부는 해외차입 부분을 너무 많이 개방했고 이것이 위기의 주된 원인이었다.”고 밝힌 당시 고위 관리의 고백은 이런 추정을 뒷받침해준다. 역설적인 것은 외환위기 이후 한쪽 주범이었던 부실 대기업은 온갖 화살을 맞으면서 구조조정을 시작했는데 비해, 다른 쪽 주범인 금융 자유화는 오히려 더욱 가속화되면서 금융화 시대를 탄생시켰다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이 시기는 내수시장 확대에 기초해 소득 불평등이 완화되고 재벌 대기업이 성장했던 것을 주요한 특징으로 하면서, 동시에 금융 자유화를 포함한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시작되기도 했다는 것, 그 둘의 잘못된 만남이 외환위기를 발생시켰다는 것이다. 결국 외환위기는 한국경제를 1996년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도록 하는 분기점이 된다. 신자유주의의 큰 흐름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기업들이 단기 수익성을 목표로 경영전략을 바꾸고 고용 유연화정책이 속속 도입되자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고용불안이 확대되어 전반적인 국민의 실질 근로소득 수준을 떨어뜨리고 실질 구매력을 약화시킨다. 대신 소매 금융이 크게 확대되는 등 금융화 현상이 확대 되면서 부채에 의한 가소비가 반짝 살아났다가 2003년 카드 대란으로 주저앉는다. 실물경제는 4%대의 성장률에 머무르는 대신 자산시장 거품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부동산과 주가가 가파른 상승 곡선을 탄다. 두터워가던 중산층이 붕괴하고 2000년대 내내 화두가 되고 있는 ‘양극화 현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겨우 안착되려던 내수기반이 재차 붕괴되고 자산시장만 활황국면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이 와중에 재벌 대기업들은 부채 축소, 수익성 개선을 내걸고 신자유주의 단기 수익추구에 편승하면서 국내 고용을 축소한다. 필연적으로 민간소비가 약화되었고 재벌 대기업들은 내수 시장 대신 본격적으로 글로벌화를 추진하면서 철저히 수출위주의 성장 전략을 구사하고 더 나아가 중국의 부상 등을 활용해 해외생산기지 건설에 나서면서 아예 투자도 해외투자, 고용도 해외고용, 외주도 해외 외주 체제로 변해 나간다. 국내 경제와 재벌 대기업의 성장이 단절되기 시작한 것이고 재벌 대기업 주도의 한국형 발전 모델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된 것이다. 1988~1996년 시기의 한국경제를 회고하면서 지금 시점에서 고려해야 할 것이 하나 더 남았다. 지금 시점에서 과거로부터 참조할 것이 있다면 박근혜 의원의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나 이명박 대통령이 주도하여 경제를 일으켰던 1970년대가 아니라 바로 1990년대를 진지하게 성찰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경제의 진정한 잘못된 단추는 1990년대 전반기 내수기반이 확대되고 중산층이 두터워지고 있는 기회를 우리경제 체질 개선과 불평등 완화를 정착시키는 데로 집중하지 못하고 비극의 씨앗인 신자유주의 도입을 서두른데 있다고도 해석할 여지가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외환위기를 맞아 신자유주의적인 길을 갔던 국민의 정부에게도 비판할 내용이 많지만, 위기가 오기 전에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틀어버린 김영삼 정부의 책임이 작지 않다.※ PDF파일 원문에서는 그래프를 포함한 본문 전체를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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