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끝의 꿀. 보편적 복지를 요구하는 시민사회를 겨냥해 한나라당 대표가 살천스레 던진 말이다. 여야 대표들이 2011년 새해 기자회견에서 곰비임비 복지를 내세우며 상대의 복지정책은 깎아내릴 때였다. 당시 한나라당 대표 안상수는 한 번 늘린 복지 예산은 줄이기 어렵다며 무책임한 복지 남발은 ‘칼끝에 묻은 꿀’을 핥는 것처럼 위험하다고 날을 세웠다. 물론, 한나라당도 복지를 하지 않겠다고 감히 주장하진 않는다. 이른바 ‘맞춤형 복지’나 ‘70% 복지’를 부르댄다. 문제는 맞춤형 복지와 70% 복지의 현실적 의미다. 대통령까지 ‘복지 포퓰리즘’을 들먹이는 이 땅에서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민중의 현실을 찬찬히 짚어볼 일이다. 한나라당 대표는 ‘칼끝의 꿀’이라는 은유로, 대통령은 포퓰리즘이라는 마녀사냥으로 언죽번죽 보편적 복지를 비난할 때, 서울의 한 지하단칸방에 살고 있던 60대 부부가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동반 자살했다. 물론, 하루 평균 40명꼴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나라에서 노부부의 자살은 정책 당국자나 언론사 고위간부들에게 하찮은 일로 다가올 수도 있다. 하지만 60대 부부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따른 수급자였다. 절망 속에 세상과 작별한 부부는 유서에서 수급비로는 생활이 안 돼 죽음을 선택한다고 명시했다. 그 유서를 쓸 때 늙은 부부는 피를 토하는 심경이었을 터다. 부부는 40만원의 수급비를 받았다. 하지만 집 월세가 30만원이었다. 남은 10만원으로 서울 도심에서 부부가 살아가려면 생활고는 물론 우울증이 필연 아니었을까. 더러는 어떻게 해서든 일을 찾아야했다고 한가하게 타박할지도 모르겠다. 자살한 부인은 양쪽 무릎관절 수술을 받았다. 병원비가 늘어났고 40만원의 수급비로는 약값을 대기도 벅찼다. 비단 수급비의 비현실성만 문제가 아니다. ‘부양의무자 기준’은 기초생활법의 대표적 독소 조항이다. 수급신청자의 소득과 재산은 기준에 부합하는데 부양의무자가 있어 수급신청에서 탈락한 비율이 절반을 웃돈다. 부양의무자 때문에 수급탈락을 받은 사람 가운데 그 의무자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부모 부양은커녕 연락조차 끊어진 자식들의 이름을 애써 감추려는 모습은 콧잔등을 시큰하게 한다. 대다수 젊은 세대들은 결혼해서 자신이 이룬 가족의 생활이 불안하기에 부모 부양에 무장 인색해가는 게 현실이다. 그뿐이 아니다. 공사현장을 전전했지만 실직의 세월을 보내던 50대 노동자가 자신이 부양능력 있다는 이유로 장애인 아들이 복지혜택을 받지 못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참극도 일어났다. 안타깝게도 기초생활법의 사각지대는 넓다. 빈곤층인 데도 쥐꼬리만 한 ‘기초생활비’조차 받지 못하는 국민이 410만 명에 이른다. 수급자의 2.5배가 넘는 규모다. 여기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의미를 폄훼할 뜻은 전혀 없다. 그나마 김대중 정부의 업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국민이라면 누구나 건강하고 문화적인 삶을 누려야 한다는 권리를 보장’한다는 기초생활법의 입법정신은 이미 현실에서 큰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기실 기초생활법 시행 10년의 성과는 초라하다. 최저생계비의 상대적 수준은 시나브로 낮아져왔다. 장애를 지녔다거나, 나이가 들거나, 몸이 아프거나, 일감을 찾기 어려운 이들에게 최저생계비는 생존의 문제와 직결될 수밖에 없다.마침 시민사회단체와 진보정당들이 곰비임비 모여 ‘기초생활 권리행동’을 결성하고 6월 임시국회에서 기초생활법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국회의원들도 개정안을 발의해 놓았지만 예산날치기 파동으로 아직까지 국회에서 제대로 논의조차 못했다. 일각에선 총선을 의식한 국회의원들이 변죽만 울린다는 비판이 나올 정도다. 물론, 부양의무자 조항을 없앨 때 언론이 우려한 ‘황제 수급자’가 나타날 수도 있다. 하지만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 수는 없다. 구더기를 침소봉대해 장을 사갈시하기보다는 장의 품질을 높일 수 있도록 제도적 보완책을 촉구하는 게 언론의 본령 아닐까. 앞서 소개한 장애인 아들의 아버지는 빈소주병과 함께 유서를 남겼다. “아들이 나 때문에 못 받는 게 있다. 내가 죽으면 동사무소 분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잘 부탁한다”는 당부와 함께 유서의 마지막을 “아들아 사랑한다”라고 쓴 고인이 목을 맨 곳은 서울 여의도다. 왜 그는 집을 떠나 멀리 여의도까지 왔을까? 바로 국회가 있기 때문이다. 2011년 현재 대한민국이 직면한 문제의 핵심은 이명박 정권의 부르대기처럼 무책임한 복지 남발이 아니다. 무책임한 복지 외면이다. 6월 임시국회에서 기초생활법 개정에 누가 찬성하고 누가 반대하는가를 언론이 면밀히 주시해야 옳다. 그 찬반은 여야 대표들이 저마다 부르대는 복지 정책의 진정성을 판단하는 잣대가 될 터다. 청와대와 한나라당, 그리고 그들의 논리를 확산해온 일부 언론에 간곡히 제안한다. 과잉복지가 아니라 최소복지, 보편복지가 아니라 희소복지, 그것이 지금 이 땅에서 칼끝의 꿀이다. *미디어오늘에 기고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