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하다. 평생을 진보운동에 바친 진보연대 정광훈 대표가 즐겨 쓴 말이다. 권력이 전교조를 ‘빨갱이’로 살천스레 몰아세울 때다. 전교조가 빨간 수박을 먹고 씨를 뱉으면 ‘참교육’이 열린다고 응수했다. 민중의 삶이 어려운 까닭도 간단했다. 전기가 양에서 음으로 흐르듯이, 권력이 민중에서 나와 정치로 흘러야 하는 데 그게 고장이 났다고 풀이했다.고통 커가고 희망 보이질 않아아스팔트 농사에 열정을 쏟은 ‘우리 시대의 농민’ 정광훈은 진보정당 선거운동 자리에서 삶을 마쳤다. 투사다운 최후다. 정광훈은 해남 동향인 ‘전사 시인’ 김남주와 오월의 투사들이 묻힌 빛고을 땅에 몸을 섞었다. 여느 윤똑똑이 먹물보다 간명하게 현실을 꿰뚫었던 ‘늙은 투사’의 희망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감히 진보대통합이라고 판단한다. 미더운 농민들 앞에서 진보대통합에 방점을 찍고 연단에서 내려오던 내게 건넨 당신의 다사로운 눈길을 잊을 수 없다.그래서다. 다시 향을 피우고 애잔하게 타오르는 향연 아래 이 글을 쓴다. 마침 진보대통합이 익어가고 있어서다. 다만 마지막 고비가 강파르다. 왜 지금 진보대통합인가부터 새삼 짚고 싶은 까닭이다. 진보대통합은 특정 정파의 이념을 위해서가 아니다. 특정 정파의 패권을 위해서도 아니다. 진보세력 개개인의 ‘자리’를 위해서는 더욱 아니다. 진보대통합이 절실하고 절박한 이유는 국민 대다수인 민중의 고통이 무장 커져가는 데도 도통 희망이 없어서다. 시장 만능의 신자유주의가 15년째 민중의 삶을 꼭뒤 누르고 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서 부자 감세에 더해 남북 갈등의 증폭으로 신자유주의와 분단체제의 폐해는 더 전면화하고 있다.그렇다면 해법은 간단하다. 신자유주의와 분단체제를 넘어서자는 데 동의하는 모든 사람이 그 최소강령으로 뭉쳐야 옳다. 문제는 그것을 넘어 특정 정파의 논리를 고집하는 데 있다. 더러는 자본주의 폐절을 선언하지 않는다고 진보대통합 논의를 폄훼하지만, 통합의 참뜻을 놓친 무책임한 선동이다. 더러는 신자유주의를 엘리트적 개념이라며 부르대지만, 대학 진학률이 80%가 넘은 나라에서 국민이 그것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예단이야말로 엘리트적 발상이다. 우리가 신자유주의에 또렷하게 선을 긋지 못할 때, 김대중-노무현 정부처럼 비정규직 확산이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정당화한다.더 큰 갈등은 대북문제에서 불거지고 있다. 분단체제를 넘어서자는 최소강령에 만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른바 ‘종북논쟁’으로 당이 쪼개진 경험을 진보세력은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통합의 자리에선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 자신이 ‘종북’으로 시험받고 있다거나, 딴 살림 차릴 명분만 찾는 ‘종파’로 경멸받고 있다는 판단이 든다면 통합은 어렵다. 남과 북의 신자유주의와 국가사회주의 체제의 한계를 넘어 선 새로운 사회를 당면목표로 삼고 두 체제의 잘잘못을 따져가자는 데까지 합의한 상황에서 대북문제로 진보대통합이 파국을 맞는다면, 우스개가 될 수 있다. 최소 강령으로 대통합 이뤄내야더구나 남쪽 진보세력에게 선결과제는 민중의 고통이다. 신자유주의를 넘어서자는 데 합의한 ‘동지’들이 대북문제로 통합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 자체가 분단체제의 굴레다. 신자유주의와 분단체제를 넘어서자는 최소강령, 아니 최적강령으로 진보대통합을 이룬 뒤 어떤 경제정책, 어떤 통일정책을 펼 것인가를 실사구시의 자세로 섬세하게 만들고 국민 앞에 내놓는 게 집권을 꿈꾸는 대안 정당이 걸어갈 길이다.눈 돌려 브라질 노동당을 보라. 3기째 집권하며 빈부차를 줄여가고 있다. 그 간단한 사실만으로도 한국 진보세력은 고통 받는 민중 앞에 석고대죄해야 옳지 않을까. 진보대통합이 최우선으로 섬길 대상은 민중이다. 민중의 거울로 자신을 비춰보면 통합은 어렵지 않다. 반신자유주의, 분단체제 극복, 국정대안 제시, 3항18자다. 진보대통합의 실사구시 철학, 간명하다.이 글은 경향신문에도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