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지하철에서 만나는 열혈 기독교인의 얘기가 아니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은 이미 ‘불신지옥’이다. 지난 3월 27일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국제교육협의회의 2009년 조사(‘국제시민의식 교육연구’)를 바탕으로 36개국 청소년의 ‘사회적 상호역량’ 지표를 계산한 결과 한국은 36개국 중 35위를 차지했다. 특히 ‘관계지향성’과 ‘사회적 협력’ 부문의 점수가 최하위라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정부에 대한 신뢰는 참여국 평균의 3분의 1 수준인 20%에 머물렀고 학교를 신뢰하는 아이들도 45%(평균 75%)에 불과했다. 전 세계 중학교 2학년 학생 14만 600명의 설문 조사 결과인데 열다섯살 가량의 이 아이들은 ‘국제학업성취도 조사’(PISA)의 대상이기도 하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은 3년마다 하는 이 조사에서 매우 뛰어난 성적(세 번에 걸쳐 평균 2위)을 차지했다. 지식은 많이 쌓았지만 협력에는 ‘젬병’이라는 얘기다. 아이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1980년부터 5년마다 시행하는 ‘세계가치조사’(World Value Survey)에서 한국은 일반적 신뢰(“남을 얼마나 믿느냐”)로 보면 조사국 평균 이상이었다. 그러나 1980년부터 2000년까지의 변화를 보면 10% 이상 신뢰가 떨어져서 영국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불신이 쌓이는 나라로 나타났다. 이번 아이들 조사까지 합쳐 보면 앞으로 우리는 더 끔찍한 불신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지난 20년 동안 수많은 학자들이 신뢰(trust), 그리고 그 결정체인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 좋은 민주주의(퍼트넘, 뉴튼, 울쿡), 개인적 행복(헬리웰), 낙관과 관용(우슬레이너), 경제성장(낵과 키퍼), 민주주의의 안정성(잉겔하트)에 필수적이라는 연구 결과를 내 놓았다. 경제성장율이 떨어지고 사회는 갈등으로 가득차고, 갈수록 살기 팍팍해져서 급기야 청소년 자살율이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른 것 모두 다 남들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뢰가 협력을 낳고 협력은 사회적 딜레마 해결의 필수 요소다. 모든 사회적 딜레마 게임(죄수의 딜레마, 사슴사냥게임, 치킨게임)에서 협력은 경쟁보다 우월한 결과를 낳는다. 신뢰란 무임승차, 즉 기회주의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거의 100% 상대방이 무임승차(배반)할 것이라고 예측한다면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는 나 역시 무임승차를 할 수 밖에 없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는 착한 사람을 바보로 취급하게 되었다. 세상은 이기와 경쟁으로 가득차고 사회 전체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아이들부터 보자면 무엇보다도 경쟁 교육을 들 수 있다. 매년 6-70만명의 아이들 이마에 등수를 불로 새기는 교육에 신뢰와 협력이 끼어들 틈은 전혀 없다. 남들이 과외시키니까 나도 시켜야 하고 남들이 안 해도 내 아이의 등수를 올리기 위해 과외를 시키는 현실은 정확히 우리가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수의 딜레마에서 인간은 모두 배반을 택할 수 밖에 없다. 무려 12년에 걸쳐 우리는 있는 돈, 없는 돈 다 들여 아이들 몸에 기회주의를 새기고 있는 것이다. “부자 되세요”라는 낯부끄러운 말이 TV를 타고 재벌회사가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며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 고위 공직자 청문회마다 부동산투기와 탈세, 병역 기피가 문제되는 사회에서 어떻게 신뢰와 협력이 뿌리를 내리겠는가. 아이들 등수부터 없애야 한다. 등수 없는 평등교육, 토론 위주 협력교육을 하는 핀란드가 피사에서 매번 1등을 할 뿐 아니라 대학경쟁력 1위와 첨단 클러스터를 자랑하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잭과 낵(Zak & Knack)은 교육과 함께 소득재분배, 그리고 결사의 자유가 신뢰를 쌓는 첩경이며 결국 사회의 발전을 낳는다는 것을 실증했다. 현 정부 정책의 정반대로 가야 우리 모두 행복질 수 있다. 신뢰를 증가시키는 옥시토신을 밥처럼 먹을 수야 없지 않은가. (관련 자료는 http://mojiry.khan.kr/) 이 글은 PD저널에도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