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한 국가의 미래가 걸린 일이며, 따라서 정치인들은 자신의 학연, 지연, 혈연과 같은 사리사욕을 초월해 장기적인 비전과 철학을 가지고 정책을 제시해야 한다. 이것은 상식이다. 이러한 상식이 잘 지켜지지 않는 것이야 국민 누구라도 뻔히 알고 있는 상황이고, 현실적 어려움 때문에, 혹은 여당/야당의 아집과 독선 때문에, 혹은 반대를 위한 반대 때문에 저 당연한 상식의 이상(理想)이 추구될 수 없다고 한탄하는 이들도 많다. 그 한탄은 주로 정치인들에게서 나온다.이러한 문제야 정치개혁으로부터 풀어야 하는 것일 테지만, 여야를 막론하고 한 목소리를 모아 별다른 충돌과 갈등도 없이 척척 동의를 하는 분야가 있으니, 그것이 과학기술정책이다. 충돌과 갈등이 없다는 사실이 첫째, 국가의 장래에 있어 과학기술이 정말 중요하다는 인식의 반영인 것인지, 둘째, 과학기술정책은 별반 새로울 것도 없고, 단기간에 민심을 얻어 선거에서 승리하는 데에는 그다지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인식의 반영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황우석 교수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어갈 무렵, 여야는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그의 환심을 얻기 위해 야단법석을 떨었다. 노무현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었다. 국부를 획기적으로 증가시킬 원천기술이 확보되는 초유의 사건이라며 언론도 야단법석을 떨었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유일하게 단 한번 과학기술이 전 국민의 초유의 관심사가 되었던 그 사태가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는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노벨상 수상이 다가올 때마다 정치인들과 국민들은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수상자들의 면면을 주의 깊게 살핀다. 지난해에는 일본에서 노벨상이 또 터져 나와 전 국민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고, 언론과 정치인들은 또다시 같은 레파토리의 기사와 선동을 반복했다. 노벨상 수상이 축구 국가대표 한일전도 아닐 텐데, 온 나라는 마치 국가대표 평가전에서 일본에게 지기라도 한 듯 침울해졌었다. 또다시 노벨상 수상자들이 국내를 방문하고, 그들의 인터뷰에서는 항상 기초과학을 튼튼히 해야만 노벨상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이 들린다. 외국의 과학자들이 한 말은 언제나 권위가 있어서, 다시금 국내의 언론은 기초과학 육성만이 노벨상을 위한 길이라며 야단이다. 문제는 기초과학 육성을 위한 정책과 비전과 철학일 텐데도, 기초과학을 육성하면 당장이라도 노벨상을 탈 것만 같은 분위기로 여론을 선동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기초과학에 대한 지원이라는 총론이 아니라, 어떻게 그것을 이루어낼 것인지에 대한 각론이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조급해하지 않고 먼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다. 조급함에 몸서리치며 근시안적인 정책들만을 남발하다간 한국의 노벨과학상은 다시금 물 건너갈 가능성이 크다.기초과학에 대한 강조의 여론이 대통령의 귀에도 들어간 모양인지, 이명박 대통령은 ‘2011년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과학기술인 신년인사회’에 참석해 과학기술에 대한 대통령의 관심을 있는 한껏 보여주었다. 특히 기초과학을 전공한 학생들이 모두 의대나 법대로 편입하는 사태에 대해 걱정하면서, 대통령은 “기초과학을 해도 존경을 받으면서 또 살 수 있는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①라고 말했다고 한다. 특히 대통령은 기초과학에 대한 홀대가 자신을 포함한 기성세대의 잘못인 것 같다며 반성의 기미를 보이셨다고 한다. 산타야나의 말처럼, 모든 진보적인 움직임은 과거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대통령의 이러한 반성과 성찰은 고무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총론이 아니라 각론이다.이명박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재래시장에서 자신의 경험을 빗대 과학적 합리성의 중요성을 설파했다고 한다. 재래시장에 대한 대통령의 관심이야 잘 알려져 있는 것이다. 서민경제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졌다는 판단이 들 때마다 대통령은 재래시장을 찾아 상인들을 위로해왔다. 때로는 그 곳에 서서 ‘오뎅’을 먹는 서민적인 모습을 연출하며 서민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치열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모습에 감격한 서민들 중 일부는 대통령의 친서민적인 모습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당장의 어려움을 잊어버렸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서민의 경제를 위협하는 구조적인 문제들, 영세상인들을 위협하는 대기업의 횡포와, 뿌리까지 썩어 있는 부동산 문제, 저출산과 관련된 양육비 문제와 학벌사회를 고착화하는 사교육 시장의 문제가 오뎅을 먹는 퍼포먼스로 풀리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기초과학 정책도 마찬가지다. 과학기술인들의 신년하례식에 참석해서 그들에게 “하나된 마음으로 과학기술계가 총력전을 펼쳐야 한다. 국운 융성을 위해 과학기술인들이 다른 분야 보다 앞장서 달라”라고 당부하는 것은 당장은 과학기술인들의 마음을 달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제대로 된 정책과 비전, 그리고 철학이 함께하지 않는다면 오뎅 퍼포먼스와 전혀 다를 바 없다.예를 들어, 여전히 대통령의 기초과학에 대한 사고가 “과학기술계도 세계 1등이 나올 수 있고 이제 그렇게 도전해야 한다”라는 자유경쟁시장 논리의 판박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러한 신년하례식 퍼포먼스 이후에 쏟아져 나온 교과부의 정책이라는 것이, ‘글로벌 박사 펠로십’이라는 명목으로 노벨상 수상을 위해 우수 대학원생 300명에게 2년 동안 6,000만원을 지급하는 수준이라면 더더욱 그렇다.②어떻게 한 국가의 과학기술 정책, 그것도 이제 겨우 기초과학에 대한 인식이 늘어가는 시점에 터져 나온 정책이 노벨상 따위를 위한 것이 될 수 있는가? 노벨상 수상이 국가를 위한 일인가? 이런 방식으로 단지 ‘노벨상’을 위해 한 국가의 장래를 결정하는 과학기술정책을 입안하는 국가가 대한민국 이외에 어디에 있는가? 다시 한번 말했듯이, 중요한 것은 총론이 아니라 각론이다. 돈을 무차별적으로 쏟아 붇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디에 쏟아 붇느냐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전문가들과 현장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고 정책을 짜는, 그런 각론이 중요한 것이다.이공계 위기가 사회에 등장했을 때에 정책이라고 내놓은 것이 이공계 국가장학생 제도였고, 그 학생들은 지금 대부분 의대나 법대에 진학해 있다. 한 국가의 정책은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선심성 정책이나 퍼포먼스가 되어서는 안 된다. 트위터의 한 지인은 저런 정책이라도 제대로 하려면 각각의 숫자에 ‘0’을 하나씩 더 붙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3000명에게 20년 동안 6억을 지원하는 제도. 노벨상을 목표로 하는 저열한 발상의 정책이라 해도, 이 정도의 장기적인 안목을 반영한 철학을 보여준다면 참 좋겠다.기초과학에 대한 지원은 오뎅 퍼포먼스 같은 것으로 쉽게 무마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특히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노벨상에 대한 전국민적인 바람이 들끓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그런 방식으로는 그 노벨상조차 영원히 갖지 못하게 될지 모른다. 노벨과학상이 등장한다 해도 그것은 국내의 지원을 받아 국내의 인력으로 해낸 일이 아니라, 한 과학자가 외국에서 외국의 지원으로 연구했던 일쯤이 될 것이고, 그러한 노벨상은 결코 대한민국의 것이 아니다. 그 과학자가 해당 연구를 수행했던 국가의 것으로 인식되어야 마땅하다.과학기술인들의 신년하례식에 참가한 대통령에게 비난을 쏟아 부을 생각은 없다. 문제는 그것이 오뎅 퍼포먼스를 넘어서는 장기적인 정책으로 이어지느냐에 있을 테다. 제발, 이제 한국에서 선동과 퍼포먼스만으로 시스템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사고가 사라지길 바란다. 그 선동에 국민들은 농락당해 왔다. 한 걸음을 내딛기 위해선,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을 숙고해볼 필요도 있다.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노벨상을 위한 ‘총력전’이 아니라 ‘뿌리깊은 반성’이 필요한 이유다.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오뎅’이 아니라 ‘과학’이 필요한 이유다.①이명박 “국운 융성 위해 ‘과학기술계 총력전’ 펼쳐야”, 대덕넷, 2011.01.09.②국고로 ‘노벨상 후보자’ 키운다, 경향신문, 2011.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