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대동단결론자. 옹근 10년 동안 내게 쏘아진 조소의 ‘화살’이다. 그럴 만도 하다. 진보세력이 2000년 민주노동당을 창당할 때부터 대동단결을 부르댔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한겨레>에 기명칼럼을 쓰고 있었다. 한줌도 안 되는 진보세력이 갈라져있다며 대동단결을 강조했다. 민주노동당과 사회당이 2000년 총선에서 갈라져 출마한 모습을 지켜만 볼 수 없었다.지금도 꿋꿋하게 진보의 길을 걷고 있는 김규항은 당시 어느 대학의 토론회에서 내게 “그렇게 밖에서만 말하지 말고 직접 뛰어들어 진보통합을 이뤄보라”고 권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언론인이 나의 ‘천직’임을 확신하고 있었기에 그럴 수 없었다.그 뒤에도 진보의 대동단결을 촉구하는 칼럼을 곰비임비 써갔다. 현실은 대동단결은커녕 되레 더 분열했다. 2008년 총선을 앞두고는 민주노동당마저 쪼개졌다. 분당을 막아보려고 <오마이뉴스>에 연일 칼럼을 썼다. 대다수 진보지식인들은 <한겨레>를 비롯해 신문지면과 방송화면에서 분당론을 부추기거나 지지했다.대동단결 칼럼 곰비임비 써온 10년그 때도 밝혔지만, 흔히 진보세력을 나누는 정파 어디에도 나는 소속되어 있지 않다. 언론노동운동은 물론, 언론개혁운동 진영에는 ‘정파’가 없었고 지금도 없는 걸로 알고 있다. 수구언론이라는 뚜렷한 상대가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가. 수구언론은 수구세력의 대변자일 뿐이다. 진보운동이 수구세력과 싸워 이 땅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한 단계 더 숙성해가야 한다면, 정파의 틀에서 벅벅이 벗어나야 옳다.2010년 6월 지방선거를 지켜보며 글과 말로 진보대통합을 주장하는 게 더는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싱크탱크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의 책임자로서 연구 활동에 전념해야 옳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복지국가와진보대통합을위한시민회의> 발기인대회에 동참하며 진보대통합 실천운동에 나선 이유다. 시민회의는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을 대표해 이학영 전국YMCA총무와 이수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 앞장서고 있다(http://unijinbo.kr).기실 나의 반성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진보대통합의 실천운동이 얼마나 어려운 길인가를 절감해서다. 무엇보다 거리 선전전에 나서는 데 나는 익숙하지 못했다. 시민회의에 참여한 ‘촛불 시민’들이 줄기차게 거리로 나서고,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을 비롯해 민중현장마다 동참하는 열정 앞에선 자괴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촛불시민들의 헌신적 투쟁이 단 한 줄도 단 한 장면도 신문과 방송에 소개되지 않는 모습을 보며 더욱 그랬다. 내가 얼마나 쉽게, 아니 편하게 진보대통합을 주장해 왔던가를 뼈저리게 반성하는 까닭이다. 아울러 내가 정치운동에 전혀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는 진실도 확인하고 있다.새로운 국민적 진보정당이 절실하다시민회의는 2010년 12월6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새로운 진보정당, 국민적 진보정당을 건설하기 위한 연석회의를 구성하자”고 진보정당들과 시민사회에 제안했다. 시민회의의 공식 기자회견 뒤에도 이상현 공동운영위원장은 기자들을 찾아 왜 지금 진보대통합이 절박한가를, 왜 시민사회단체가 나서 연석회의를 제안하는 게 절실한가를 애면글면 설명했다. 기실 저 굴욕적인 한미FTA 재협상과 전쟁 위기로 치닫는 남북관계를 비롯해 이 땅에는 캄캄한 먹장구름이 몰려오고 있지 않은가.그래서다. 진지하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저들에 맞서 과연 진보정당과 촛불시민들이 하나로 거듭날 수 있을까? 십시일반으로 꾸려가는 시민회의의 기자회견은 몇몇 인터넷신문을 제외한 거의 모든 언론에 외면당했다. 진보대통합의 바람도 아직은 불어오고 있지 않다. 그 바람을 불러오는 데 나의 문필은 너무 뭉툭하고 행동은 더 굼뜨다. ‘진보 대동단결론자’라는 조소의 화살이 다시 앙가슴 깊숙이 박혀오는 까닭이다. 회한에 잠겨 이 나라의 내일을 성찰하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