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연휴의 끝자락인 2010년 9월25일 토요일 오후.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복지국가와 진보대통합을 위한 시민회의’(시민회의)가 거리 선전전에 한창이었다. “진보정치 하나로!”와 “썩고 구린 정치인 공직취임 금지 법안” 에 시민들이 곰비임비 서명했다.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드러난 썩고 구린 공직후보자들의 ‘추억’이 김황식 총리 후보자의 청문회를 앞두고 되살아나서일까. 선뜻 서명에 동참하는 시민들이 많았다. 물론, 지나가던 시민들이 서명대 앞으로 가기까지에는 친절하고 정중하게 동참을 권하는 촛불시민들의 눈부신 활동이 있었다. 흰 수염 휘날리며 내내 큰 목소리로“30초면 애국자 된다”고 부르짖은 ‘촛불 시민’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흰 수염 펄펄 휘날리며 “30초면 애국자 됩니다.” 호소얼굴 가득한 주름, 소박한 검은 옷차림에 운동화, 열정적으로 서명 동참을 권하던 그 분이 잠시 쉬고 있을 때 다가갔다. 예의를 갖춰 춘추를 여쭸다. 1934년생이란다. 우리 나이로 올해 77살. 놀라운 정열이다. 한가위 연휴 전날에는 6시간 내내 거리선전전을 폈단다. 그때는 한국방송(KBS)의 수신료 인상에 반대하는 서명을 받았다. 2008년 촛불항쟁 때부터 거리에 나서 그 뒤 줄기차게 민주주의를 일궈가는 데 동참해왔다. 77살 촛불시민의 깊은 주름살이 촛불의 상징인 10대 여학생 못지않게 싱그럽다.마침 한 50대 후반의 시민이 총총 다가와 팻말에 적힌 “진보정치 하나로!”의 뜻을 물었다. 두 시민 사이에 오간 ‘거리의 대화’를 소개한다.“2012년에 한나라당이 다시 집권하는 걸 막으려면 진보세력이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겁니다.”서명대 앞까지 온 시민의 물음에 ‘77살 촛불’은 성의를 다해 설명했다. 50대 후반은 실소를 머금고 응수했다.“그게 여기서 서명운동 한다고 되겠어요? 하나였던 민주노동당도 갈라졌는데…. 에이, 어떻게 진보세력이 모두 하나로 뭉쳐요?”“아, 그래서 서명운동 하는 거 아닙니까?”“진보가 뭉치려면 진보 정치인들이 마음부터 비워야 해요! 그 사람들이 마음을 비우지 않으면… 쯧쯧.”“그 사람들이 마음을 비우게 하려면 우리가 압박해야지! 우리가 주권자이잖아요! 자, 여기 서명하쇼!”서명을 권하며 ‘77살 촛불’은 강조했다.“30초면 애국자 됩니다.”30초, 서명에 걸리는 ‘최장 시간’이다.하지만 그 50대는 서명을 외면하고 다시 되물었다.“글쎄, 그게 서명한다고 됩니까?”옆에서 “진보정치 하나로!” 전단지를 나눠주던 내가 슬그머니 거들었다.“선생님은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진보통합을 이루려면 이런 일도 시작해야 옳지 않겠습니까?”두 진보정당만의 통합을 넘어 ‘촛불시민’의 동참 절실그 물음에 아무 말도 없던 50대는 머뭇머뭇 거리다가 끝내 서명하지 않고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그가 망설이던 시간은 “30초”보다 훨씬 길었다. 지금 나는 그 50대 후반을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기실 진보정치가 대통합을 이루려면 정치인들이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말은 어쩌면 핵심을 찌르는 지적일 수도 있다.그런데 어떤가. 민주노동당의 ‘이정희 체제’도 진보신당의 ‘조승수 체제’도 진보대통합 또는 진보대연합을 공언하고 있지 않은가. 더구나 시민회의(http://cafe.daum.net/unijinbo)가 제안하는 진보대통합의 대상이자 주체는 두 진보정당만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체제와 분단 체제를 넘어서려는 모든 정치세력이다. 특히 기존의 정당들이 담아내지 못했던 민주시민들이다. “진보정치 하나로!” 서명과 거리 선전전이 절실한 이유다. 전단지조차 받기를 거부하며 바삐 가는 젊은이보다 그것을 건네는 77살 촛불시민이 한결 더 젊어 보인 이유도 거기 있다.그날은 과연 언제쯤일까. 이정희 체제의 민주노동당과 조승수 체제의 진보신당을 비롯해 모든 진보정치 세력이 촛불시민들과 하나가 되는 그 날은. 모처럼 길었던 한가위 연휴, ‘77살 촛불’을 만나 참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