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비평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최근 들어 문득문득 밀려오는 의문이다.신문기자로 20여 년 살아갈 때, 언론노동운동에 몰입할 때, 언론학을 공부하고 가르칠 때, 시사칼럼을 쓸 때 지녔던 믿음이 있었다. 진실은 언젠가 이긴다는 믿음, 언론이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믿음이 그것이다.하지만 요즘 들어 글을 쓰는 데 회의감이 부쩍 많이 든다. 언론개혁을 부르대온 지난 시간을 후회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정반대다. 칼럼을 쓰는 데 회의감이 밀려오는 바로 그만큼, 이 땅의 언론개혁운동이 전선을 재정비해서 다시 불붙어야 할 때라는 판단도 짙어가고 있다.문제는 저 도도한 탁류에 있다. 속절없이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어가서일까. 과연 저 탁류에 맞서 진실이 이길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 스멀스멀 고개를 내밀 때가 많다.저 흙탕물이 말과 글로 맑아질 수 있을까.보라. 위장전입은 저들에게 ‘불감증’이 되었다. 엄연한 범법행위를 저질러놓고 아무런 부끄럼이 없다. 이명박 대통령부터 위장전입을 되풀이한 전력 때문일까. 위장전입자들이 버젓이 국무총리, 대법관, 법무장관, 검찰총장 자리를 지켜서일까.인사청문회를 앞둔 ‘고위공직자’들은 위장전입의 범법을 ‘사과’ 한마디로 슬그머니 넘길 깜냥이다. 언론도 비판의 ‘통과의례’로만 여기는 눈치다. 그들이 고위 공직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치열한 문제의식이 진보언론에도 잘 보이지 않는다.심지어 은근히 정당화하는 신문들이 있다. 가령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 위장전입에 시퍼런 칼을 들이대던 <조선일보>는 “위장전입병 언제까지 앓기만 할 건가” 제하의 사설(2010년 8월19일자)에서 “불법을 적발해야 하는 책임자, 불법을 판단하는 대법관, 법을 만드는 의원 모두 위장전입 사태가 불러오는 ‘법치주의의 대혼란’에 무감각해져 버렸다”고 개탄하면서도 ‘물타기’를 서슴지 않는다. 지난해 위장전입 등의 주민등록 허위신고 사례가 10만7093건에 11만5335명으로 조사됐지만 27건만 고발됐다거나 검찰이 “위장전입 하나만 처벌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법원 역시 기소된 사람 중 극히 일부에 대해서만 수십만 원 정도의 벌금형을 내리고 있는 실정”이라고 쓴다. 결국 “정부와 국회가 함께 ‘위장전입 열병’을 끝낼 사회적 합의 도출을 위해 고민하고 행동에 나설 때도 됐다”고 주장한다.어떤가. 명토박아두거니와 이 글을 읽는 대다수 독자들은, 아니 민주시민들은 결코 위장전입을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위장전입을 허용한다면, 그것은 부와 권세를 누리는 자들과 그들의 자녀들에게 특혜를 줄 따름이다.엄연한 범법에 물타기 하는 저들을 보라청문회를 앞두고 위장전입에 날을 세우는 민주당도 두고 볼일이지만 진정성이 다가오지 않는다. 위장전입 문제로 심판받았던 인사를 무람없이 재보선에 공천한 게, 그래서 이명박 정권의 치기를 한껏 부추겨준 당사자가 바로 민주당 아니던가.실제 정치의 도도한 탁류 앞에서 정치를 비평하는 시사칼럼을 쓴다는 게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짙은 회의가 무장 몰려오는 이유가 여기 있다.말이 아니라 실천, 글이 아니라 행동이 더 절실하지 않을까. 201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저 거친 흙탕물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다음 세대를 또한 탁류에 휩쓸리지 않겠는가. 과연 저 탁류가 글을 쓴다고, 글로 생각을 나눈다고 멈출 수 있겠는가. 정치비평의 한계를 절감하는 까닭이다. 손석춘 2020gil@hanmail.net* 이 글은 ’손석춘의 새로운 사회’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블로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