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국과학기술평가원(KISTEP)은 학생 및 연구인력의 해외 유출입에 대한 통계를 발표했다. 외국에서 이공계열 박사학위를 취득한 인력은 꾸준히 증가세에 있으며 미국내의 외국인 박사학위 취득자의 9.5%에 이른다고 한다. 1999년까지만 해도 이들 중 절반 정도가 해외잔류의사를 밝혔으나, 이제 해외잔류의사를 밝히는 이들의 비율은 70%에 육박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공계 고급인력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반면 이들에 대한 처우는 그다지 개선되지 않았다. 이공계 인력들은 심한 경제적 박탈감을 느끼고 있으며, 그것이 국내 거주 이공계 박사 가운데 1/3이 이민 또는 해외 장기 체류의도를 가지는 결과로 나타났다[1]. 새롭지도 않고, 언제나 존재했으며, 여전히 반복되는 현상이다. 이공계 고급인력의 해외유출이 도마에 오를 때마다 그들에 대한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고 곧 잊혀졌다. 요즘은 정부출연연의 구조조정과 관련해 국가과학기술위원회의 위상에 관한 논의가 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 조금 다를 뿐이다[2]. 이공계기피현상의 구조적 원인이공계 기피는 오래 전부터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앓아온 질병이니 별반 새로울 것은 없다. 오히려 1980년대 과학자가 청소년들의 장래희망 1위를 차지했던 우리의 과거가 예외적일 지도 모른다. 또한 이공계위기를 하나로 묶어 논의하는 것도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이학계열과 공학계열의 사회적 지위는 서로 다르다. 박정희 정권 이래로 공학계열과 기술자들의 사회적 기능은 중요하게 인식되어 왔고, 이제 사회곳곳에서 공학계열 종사자들의 활약을 보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다. 단적인 예로 2009년 4년제 대학 졸업자의 취업률에서 공학계열은 의약학계열과 비슷한 53%의 취업률을, 인문계열과 자연계열은 각각 30.2%와 34%를 기록했다[3]. 그렇다고 해서 공학계열 대졸자의 처우가 좋은 것은 아니다. 2005년의 통계자료에서 신용평가사의 대졸초임연봉은 3,500만원, 금융업종은 2,400~3,000만원 수준으로 전자 및 IT업종의 1,800~2,300만원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4]. 이런 상황에서 이공계 대졸자들이 의학전문대학원과 법학전문대학원으로 몰리고, 해외로 도피하는 것을 막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애플이 아이폰과 아이패드로 세계시장을 석권하고 나서야 부랴부랴 개발자들과 엔지니어들에 대한 처우를 이야기해봐야 별반 소용이 없다. 문제는 심각한 구조적 모순에 있기 때문이다.따라서 이공계위기의 본질을 기초학문의 위기라는 더욱 넓은 스펙트럼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호소력을 갖는다. 최근의 인문학은 학문적 정진보다는 ‘인문학의 위기’라는 화두에 매달려 있다는 느낌이다. 이공계 기피와 인문학의 위기는 따로 떼어 논의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한국은 심각한 기초학문의 위기를 겪고 있다[5]. 송성수는 <한국 과학기술활동의 성장과 과학기술자사회의 특징: 시론적 고찰>이라는 2004년의 논문에서 한국 과학기술인사회의 내부적 특징으로 네 가지를 꼽았다. 첫째, 한국의 과학기술활동이 주로 외형적 측면에 초점을 두고 성장해왔다는 점, 둘째, 기초연구가 경시되어 왔다는 점, 셋째, 산학협동이 미흡하다는 점이며, 넷째, 과학기술인 리더그룹의 형성이 미진하다는 점이다[6]. 한국 과학기술정책은 위기가 닥칠 때마다 언제나 세 번째 문제에만 골몰해왔다. 박정희 시대의 전통을 그대로 답습한 정치인들은 과학기술의 위기를 경제성장과 관련 지어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원초적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때때로 기초연구의 부족이 화두가 되기도 했지만, 언제나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올 뿐이었다. 또한 기초연구의 부족은 노벨상이라는 국격의 상징과 연계되었을 때에만 정치인들의 관심을 끌 수 있었다. 기초연구에 대한 투자는 노벨상을 받기 위한 것이고, 이는 정치인들의 기초연구에 대한 사고가 월드컵 국가대표를 바라보는 것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유치한 수준임을 드러낸다.물리학 박사 출신의 독일 총리선진국들과의 비교에서 알 수 있듯이 과학기술인 리더그룹의 부재는 전통과 문화, 국민과 정치인들의 인식을 비롯한 과학기술을 둘러싼 구조적 문제의 한 축이다. 당연히 대부분의 문제는 뿌리깊은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된다. 이공계 기피현상이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을 때에도, 현정부 들어 과기부가 교과부로 통합되던 때에도, 정부출연연구소의 문제가 불거져나올 때에도 언제나 단골메뉴처럼 등장하는 소재가 있다. 이웃나라 중국의 이야기다. 중국공산당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정치국원 9인 중 후진타오 국가주석을 비롯한 7인이 이공계 출신이라는 것이다[7]. 중국뿐 아니라 프랑스도 엘리트 양성을 주축으로 하는 교육제도를 바탕으로 과학기술인이 정부 관료로 진출하는 전통이 형성되어 있다. 독일의 메르켈 총리가 물리학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최근 사임하긴 했지만 일본의 하토야마 총리도 응용물리학을 전공했다. 물론 우리도 박정희 정권시절에는 해외유학파 출신의 공학자들이 과학정책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었다. 하지만 점차 그런 활동은 축소되기 시작했다. 단적인 예로, 16대 국회의 경우 이공계 출신이 차지하는 비중은 5.0%다. 중국은 34.1%, 러시아는 32.0%, 프랑스는 19.8%, 일본은 10.4%를 기록하고 있다[8]. 국회의원이나 정부고급관료 중 이공계의 비율이나, 이를 선진국과 비교하는 통계를 보면 더욱 가관이지만 굳이 나열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각 국가간의 문화와 전통과 경제적 상황이 다른 마당에 이런 방식의 직접적인 비교는 무리가 따를 수 있다. 모택동과 등소평을 거치며 중국은 과학기술을 통한 산업화를 추진하면서 기술자를 우대하는 전통이 확립되었고 이 상황은 공학계열의 기술자들이 고위 관료로 임명되던 1960~70년대의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일본은 이제야 겨우 학부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총리가 선출되었을 뿐이다. 오히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독일처럼 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딴 인재가 총리로 선출되어도 별다른 이질감을 보이지 않는 선진국의 문화적 역량이다. 그리고 그러한 문화와 국민들의 인식은 하루아침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문화적 전통이란 알게 모르게 우리의 역사 속에서 서서히 누적되어온, 우리가 매일 마주쳐야만 하는 생생한 현실이다.과학기술과 중인의식박성래는 이러한 현상의 역사적 기원으로 ‘중인의식(中人意識)’을 지적한다[9]. 한국의 전통사회에서 과학기술은 중인계층이 담당해 왔고,, 양반으로부터 차별을 당했지만 전문직종으로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국가나 사회와는 단절된 의식이 형성되었다는 주장이다. 박성래의 주장에 동의할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이러한 중인의식이 식민지시기를 거쳐 20세기까지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왔다는 점은 중인의식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여지를 남긴다. 나아가 이러한 과학사학자들의 인식 기저에는 모든 책임을 과학기술자 사회에 부과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중인의식에 대한 평가는 잠시 뒤로 미루기로 하자.물론 조선왕조가 뿌리깊은 문과에 대한 숭상과 유교적 이념으로 무장한 관료주의에 기반해 존속해왔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조선왕조에서 성립된 과학기술자 계층의 중인의식이 현대에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설명은 우리가 현재 기대고 있는 역사적 기반이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조선왕조로부터 크나큰 단절을 겪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오히려 식민지 치하에서 반상의 구분이 서서히 사라져가는 시기에도 과학기술인이 중인계급의 차지가 될 수 밖에 없었다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친일파가 여전히 청산되지 않았고, 그들이 펼쳐놓은 경제적 불평등이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과학기술인사회의 중인의식의 연원 또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현재까지 지속되는 중인의식의 연원이 조선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만 하는 거대담론 속의 형이상학이 아니라, 기껏해야 60년도 채 되지 않은 해방전후사 위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해방전후사를 이해하는 것 또한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 해방전후사를 통해 이해된 구조적 모순은 개발독재 시대에 다시 등장하는 중인의식과 현대에 이르러 나타나는 이공계기피현상과 더불어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중인의식이라는 단순한 설명방식만으로는 결코 서술될 수 없는 복잡한 우리만의 역사인 것이다.중인의식의 영원한 반복개발독재시대에는 국가가 주도적으로 과학기술자를 보호함과 동시에 통제했다. 당시의 중인의식의 발로는 이미 박정희 시대를 개괄하며 쓴 졸고에 기록되어 있다[10]. 요약하자면 당시의 과학기술은 정치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되었다. 정치권력의 유지는 경제개발이라는 현실적 조건 속에서 정당화되었고, 과학기술자들은 철저히 이용되고 결국 버려진 것이다. 박성래의 말처럼 과학기술자들의 뿌리깊은 중인의식이 과학과 현실의 단절로 이어지는 것이라면, 개발독재 시대의 과학기술자들은 그렇게 단정지을 수 없다. 그들에겐 국가경제의 재건이라는 사명이 있었고, 그런 측면에서 그들은 결코 현실 그리고 사회와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중인의식의 발로는 그들이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하며 현실과 분리됨으로 인해 나타난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의 수동적 도구로 사용되면서 나타난 결과였다.또한 식민지 시기에 과학기술인이 양성되는 과정은 국가의 주도가 전무한 상태에서 개인의 자발적 선택에 의한 결과였다. 과학기술인들은 개발독재시기와는 판이하게 다른 사회적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 당시를 면밀히 분석하는 것이 중인의식이라는 개념을 더욱 명확히 하는데 도움이 된다.김근배의 <식민지시기 과학기술자의 성장과 제약>이라는 논문[11]은 박성래가 중인의식으로 간단히 규정해버린 상황을 당시의 사회적 맥락 속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당시 과학기술을 전공으로 선택한 이들은 대부분 중류층이었다. 이들이 과학기술을 전공으로 선택하게 된 이유는 대부분 현실적인 조건 때문이었다. 그리고 현재의 우리상황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즉, 남들이 하지 않는다거나, 수학이나 과학을 잘하기 때문이라거나, 의학분야로 가려다가 실패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과학기술자로서 원대한 꿈을 가지고 직업을 선택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이러한 상황은 일제치하에서 상류층들이 자신의 자제들을 법학, 문학 및 의학 쪽으로 공부시키며 사회의 상층부를 잠식해 간 것과 무관하지 않다. 부호들은 전통적인 문과에 대한 숭상과 더불어 식민지 치하의 권위를 실감했었고 따라서 이러한 분야를 공부하는 것이야말로 권위와 신분상승을 도모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따라서 중류층으로서는 “과학기술이라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게다가 일제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더 이상 과학기술의 진흥은 닥쳐온 현실에 대한 실천적 구호가 될 수 없었다. “사회적 과제는 더 이상 개화, 자강, 문명 등과 같은 추상적 구호나 장기적 목표가 아니라 민족독립, 차별철폐, 물산장려 등과 같이 당장의 구체적인 현실이 되었던” 것이다. 민족독립운동 진영은 과학기술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고, 물산장려운동 역시 과학기술을 일종의 수단으로 여겼다. 상류층과 사회지도층이 과학기술을 거들떠도 보지 않거나 도구로나 여기는 상황에서 과학기술을 직업으로 선택한 중류층은 자연스럽게 사회로부터 괴리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지는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이다. 또한 과학기술을 전공한다고 해도 일본인을 우선적으로 채용하는 현실 속에서 마땅한 진로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었다. 실제적으로 과학기술을 택한 중류층은 이를 통해 어떤 대단한 권위나 명예, 실리를 누릴 수 없었다. 박성래의 중인의식이 형성될 수 없는 상황이었던 셈이다. 과학기술인들을 사회로부터 분리시켜 중인의식을 갖게 만든 것은 그들 자신이 먹고 살만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어쩔 수 없기 때문이었다. 상류층과 사회지도층 모두에게서 거부당한 그들에게 선택의 여지는 남아 있지 않았다.과오는 힘을 지녔던 이들에게 있다오히려 중인의식의 죄는 당시의 상류층과 사회지도층에게 물어야 한다. 이 점은 같은 시기의 일본과 중국의 예를 보면 너무나 명확하게 드러난다. 당시 일본과 중국에서는 사회지도층과 상류층의 인사들이 과학기술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인의 대다수가 바로 그들 자신이었다. 1880년 당시 일본 과학기술인의 79%가 사무라이 출신이었다. 1910년 중국에서 미국의 과학기술분야로 유학을 간 이들의 대다수가 신진사대부 출신이었다. 17세기 유럽의 과학이 귀족계급에서 출현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18-19세기를 거치며 점차 기회가 확대되어가기는 했지만 19세기 초반까지도 과학은 귀족의 전유물이었다. 과학기술은 사회에서 천대받지 않았고, 귀족들은 새로운 지식체계에 대해 토론하고 이를 향유하는 것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러한 전통 속에서 영국엔 왕립학회가 설립되었고, 상류층에서 시작한 과학문화는 자연스럽게 사회에 정착할 수 있었다.식민지 시대로 접어들기 전 개화파에게서 우리도 일본과 중국과 비슷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당시의 사회지도층을 무조건 비난하기는 어렵다. 식민지 치하에서 당장 중요한 것은 현실적인 문제들이었기 때문이다. 김근배의 말처럼 “과학과 현실이 분리되지 않은 채 우리의 것이 될 기회가 있었으나 곧 일제에 강제병합 당하면서 모든 게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제의 본질을 중인의식으로 돌릴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당시의 상황은 과학기술인들이 스스로 바꿀 수 있을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현실에 맞추어 살아남는 것이 급급한 상황 속에서 그들에게 중인의식의 죄를 묻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깝다.식민지 시대와 개발독재 시대의 과학기술인들의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하지만 박성래의 분석대로라면 그들 모두에게는 중인의식이라는 뿌리깊은 사고가 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똑같다. 이공계기피가 화두가 되고, 과학기술인력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현실에서도 어떤 이들은 과학기술인들의 중인의식이 현 상황을 고착화시키는 원인이라고 지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문제는 과학기술자의 중인의식이 아니다. 문제는 중인의식이 아니라, 그들을 중인으로 취급하는 사회의 인식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적 인식을 유발시키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다. 조선시대에도 그러한 사회적 인식 때문에 과학기술인들은 중인의식에 사로잡혔고, 개화기에 들어서야 겨우 중인의식을 벗어날 기회를 잡았었지만 곧 일제식민지라는 불행에 직면할 수 밖에 없었다. 일제 식민지치하에서 중류층은 어쩔 수 없이 과학기술을 업으로 선택했다. 민족의 운명이 걸린 상황에서 상류층은 제 살길을 찾기 위해 법조계와 의료계로 눈을 돌렸고, 사회지도층은 과학기술을 쳐다볼 여유가 없었다. 있었다 하더라도 과학기술은 수단으로만 인식될 뿐이었다. 개발독재시대로 접어들면서 과학기술은 경제개발의 도구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과학기술이 도구가 되면서 과학기술인들도 기능인으로만 인식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한 사회적 구조 속에서 다시 한번 과학기술인들은 중인의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를 사는 우리들은 바로 그 전통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중인의식인가 사회적 인식인가필자는 박성래와 같은 과학사학자들이나 송성수와 같은 과학사회학자들이 한국과학기술인들의 처우에 대해 분석하는 글을 보면서 한가지 의문을 갖게 된다. 한국과학사에 대한 치밀한 연구 끝에 박성래는 결국 ‘중인의식’이라는 간명한 개념으로 과학자들의 자각을 촉구하고 모든 잘못을 구조적 모순보다는 과학자사회에 전가시켜버린다. 송성수는 다양한 설문조사와 통계분석을 통해 구조적 모순을 보여주기보다는 한국과학기술자사회의 소통부재와 자기중심적 사고를 지적하는 데 그친다[12]. 무릇 “보수적인 성향의 사람들은 어떤 사회적 사태의 원인을 개인 차원에서 설명하는 경향이 높고, 진보적인 성향의 사람들은 구조적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높다”는 말이 떠오른다[13]. 가장 좋은 예로 “범죄를 범죄자의 개인적 특질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경향이 보수적인 사람들에게 높은 반면에, 진보적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사회경제적 환경이 범죄자를 만든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높다.” 과학기술인들이 처해있는 현실적 문제에 대해 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문제는 그것을 해결하는 방식에 있다. 개발독재 시대 이래로 정부는 사회적 인식이라는 구조적 측면을 해결할 생각은 하지 않고, 문제를 가리고 땜질을 하는 데에만 집중해왔다. 과학기술 자체를 연구하는 과학학자들은 구조적 문제를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언제나 원인을 과학자사회에게 전가시켜왔다. 인문사회과학의 열악한 상황이 그들에게 원한을 갖게 했는지도 모른다. 과학기술자사회는 지나치게 정부에게 의존함으로써 자신들을 자발적 중인으로 만드는데 일조해왔다. 문제는 중인의식이라는 현상을 인식하는데 있지 않다. 같은 중인계급이었던 상인계층이 빠르게 사회의 상층부로, 사회지도층으로 전이되어간 과정만 살펴보아도 문제의 원인이 한 집단이 아니라 사회전체에 걸쳐 있는 복잡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말로만 과학기술사회를 떠든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과학기술인들을 상류층으로 올려놓아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정답은 언제나 간단한 원칙 속에 있다. 그들이 일한 만큼, 그들이 사회에 공헌한 만큼의 대우를 해주면 되는 것이다. 그때에서야 과학기술인들은 마침내 중인의식을 벗어나 사회 속으로 걸어 들어가 함께 사회의 주인이 될 수 있다. 그 길은 쉽지도 가깝지도 않다. 이제서야 일본에서 물리학 전공의 총리가 등장했듯이, 부단한 노력을 경주한 후에야 우리도 그런 역사를 품게 될 것이다. 사회적 인식이 변하는 과정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법조계나 경제계의 인물이 아닌, 과학기술인으로 평생을 산 어떤 존중 받을만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도 국민이 전혀 이질감을 느끼지 않을 때, 그때에서야 과학기술인들은 중인의식에서 해방될 수 있을 지 모른다.김우재 korean93@postech.ac.kr트위터 @heterosis[1] 이공계 박사 3만5천 명… 외국 나갈 준비, KISTEP, 학생 및 연구인력 해외 유출입 분석, 사이언스타임즈, 2010.8.9. [2] 민간위 ‘개편안’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덧넷, 2010.8.10.[3] 인문-자연-교육계 졸업자, 첫 직장 1위는 학원강사, 더사이언스, 2010.2.16.[4] 박경진, 과학기술 인력정책 평가와 과학기술인 사회 비교, 한국인사행정학회보, 제4권 제1호, 2005, 96쪽.[5] 이종필, 이공계위기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한겨례, 2004.11.22.[6] 송성수, 한국 과학기술활동의 성장과 과학기술자사회의 특징: 시론적 고찰, 과학기술정책, v.14, no.1, pp.77-93, 2004.[7] 이영백, 대한민국, 왜 중국처럼 안되는가? 디지털타임즈, 2010.8.6.[8] 박경진(2005), 94~95쪽.[9] 박성래, <한국사에도 과학이 있는가>, 교보문고, 1998, 300-302쪽.[10] 김우재, 노벨상과 경제발전, 그리고 박정희의 유산, 새사연칼럼, 2010.4.26. [11] 김근배, 식민지시기 과학기술자의 성장과 제약: 인도ㆍ중국ㆍ일본과 비교해서, 한국근현대사연구 제8집, 1998. [12] 송성수, 한국 과학기술활동의 성장과 과학기술자사회의 특징: 시론적 고찰, 과학기술정책, v.14, no.1, pp.77-93, 2004. [13] 박동천, “세종대왕 ‘찬양’은 왜 위험한가”, 프레시안, 2009.2.21.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