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항쟁 30돌을 맞은 2010년 5월18일, 유족들의 가슴엔 추적추적 찬비가 내렸다. 을씨년스럽게 내리는 비 때문이 아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지 못하게 살천스레 막은 공권력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에게 곧장 묻는다. 감히 누가 유족들이 ‘오월의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막았는가? 그런 ‘지시’를 한 자를 찾아내 책임을 물어야 옳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막고 30돌 기념 행사장에서 ‘방아타령’을 연주하려고 했던 자는 일벌백계로 다스려야 한다. 논란을 빚자 연주를 취소했다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대체 어떤 발상이었는지 조사해서 정부 차원의 해명이 있어야 마땅하다. ‘오월의 노래’ 부르지 못하게 한 자 책임 물어라 바로 그래서다. 나는 정운찬 국무총리가 대신 읽은 이명박 대통령의 기념사를 대통령 스스로 되새겨보길 간곡히 촉구한다. ‘성숙한 민주주의’ 운운한 대목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기념사에서 대통령은 주장했다. “올해로 30년을 맞은 5.18민주화운동의 정신은 이제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젊어지는’ 큰 강물이 되어, 한국 민주주의의 새 물결로 거듭 나야 하겠다.” 좋은 말이다. 하지만 그 대목을 읽을 때 걸렸다. “거듭 나야” 한다는 데 그 “거듭”이라는 말로 그가 무엇을 말하려고 할까 의문이 들어서다. 예상은 전혀 빗나가지 않았다. 그는 “5.18민주화운동의 정신은 오늘날 우리에게 ‘화해와 관용’에 기초한 성숙한 민주주의의 실현을 요구하고 있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권위주의 정치가 종식되고, 자유가 넘치는 나라가 되었지만 우리는 아직 민주사회의 자유에 걸맞은 성숙한 민주주의를 이루었다고 말하기 어렵다”고 부르댔다. 그 뿐인가. “많은 분열과 대립이 한국 민주주의의 성숙을 가로막고 있다”며 “남북 분단으로 인해 숱한 비극을 겪었으면서도 지역과 계층, 이념 등에 따라 또 다시 완고한 분단의 벽을 세우고 있다”고 개탄했다. 어떤가. 왜 대통령 스스로 다시 읽어보길 권하는지 아마도 적잖은 독자들이 단숨에 꿰뚫었을 터다. 선입견 없이 찬찬히 짚어보자. 유족들에게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지 못하게 하는 정권에, 방아타령을 연주하려 했던 정권에, 어떻게 대응해야 ‘화해와 관용’인가? 보라. 누가 지금 ‘권위주의 정치’를 되살리고 있는가? 누가 지금 곳곳에서 “분열과 대립”을 부추기고 있는가? “남북 분단으로 인해 숱한 비극을 겪었으면서도” 누가 지금 “완고한 분단의 벽”을 세우고 있는가? 대통령이 개탄한 행태의 주체는 과연 누구인가 바로 이명박 정권 아닌가? 대통령 자신 아닌가? 생게망게한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대통령은 “민주주의의 출발점인 생산적인 대화와 토론이 뿌리내리지 못했다. 법을 무시한 거리의 정치와 무책임한 포퓰리즘에 기대는 일이 적지 않다”고 언죽번죽 주장한다. 거듭 묻는다. 대체 생산적인 대화와 토론을 거부하고 누가 ‘4대강 사업’을 강행하고 있는가? 미디어법은 누가 날치기 처리했는가? 법을 무시한 조전혁을 비롯한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대통령은 어떤 말을 했던가? 대통령 이명박은 결국 기념사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이 맺는다. “신록이 우거져 가는 5월에, 이 땅에 화해와 관용이 넘치는 민주주의를 활짝 꽃피우고, 온 국민이 다 함께 잘사는 선진일류국가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자.” 과연 오늘이 ‘신록이 우거져 가는 5월’인가. 권력의 잘못에 결코 눈감지 않는 게 바로 오월의 정신이다. 저 빛나는 오월의 투사들이 가르쳐준 생생한 교훈이다. 억압 위에 화해는 화해도 관용도 아니다. 기만이다. 새삼 이명박 대통령에게 오월이 무엇인가를 준엄하게 묻는 까닭이다. 손석춘 2020gil@hanmail.net* 이 글은 ’손석춘의 새로운 사회’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블로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