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등만 살아남는 비열한 세상

By | 2010-04-23T09:35:24+00:00 2010.04.23.|

세계적 석학으로 평가 받는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gymunt Bauman)은 오늘날의 빈곤층은 실업자가 아니라 결함 있는 소비자 즉 ‘비소비자’이며, 따라서 이들의 존재는 소비자사회의 회계장부에서 (현재 또는 미래에) 자산으로 기록될 수 없는 ‘절대적 채무’라고 말했다. 현대 소비자사회는 그 구성원들을 생산자가 아닌 소비자로 기능하게 하고, 따라서 빈곤층을 ‘쇼핑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그려낸다는 것이다.우리들 주변을 돌아보자.공중파 광고와 드라마에 등장하는 과잉 포장된 상품과 사치스런 소비를 지켜보면서 소유에 대한 욕망은 커지고, 사람들은 욕망에 따라 행동할 수 없는 현실에 불만을 품고 스스로 ‘가난하다’고 느낀다. 소비 그 자체가 성공적인 삶과 행복, 심지어는 인간 품위를 결정짓는 ‘기준’으로 해석되고, 따라서 본인의 ‘생활수준에 맞춰 사는’ 방식으로는 결코 만족감을 느낄 수 없게 된다. 욕망을 자극하는 기제들은 우리들 삶과 일상 주변에 무한정 깔려있고, 보통의 판단능력과 정서를 가진 사람들은 그 유혹을 떨치기가 어렵다. 이렇게 (소비자) 시장의 ‘제약 없는’ 지배 메커니즘은 많은 사람들을 부채의 수렁에 빠뜨린다.한편,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흉물스런 ‘성장 발전’ 모델은 더 낮은 비용과 더 높은 이윤을 위한 자본 이동게임(값싼 노동력을 찾아 지구촌 곳곳을 메뚜기 떼처럼 이동하는 것)을 추동하고 그 결과,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실업자들이 양산된다. 사람들이 실직하는 이유는 게으르거나 무능력해서가 아니다. 자신에게 할당될 ‘일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른바 ‘세계화(globalization)’ 과정을 통해 필연적으로 발생되는 잉여 인력의 창출은 ‘노동시장의 유연성(flexibility)’이라는 포장지를 쓰고 세상에 제시된다. 이제 더 이상 ‘안정된’ 일자리는 없다. 과거 영구적이고 확실했던 일자리들은 임시직과 기간제의 형태로 빠르게 대체된다. 물론 우리나라 역시 예외가 아니다.이러한 기반 위에서, 그 원인이 무엇이건 우리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미 ‘잠재적인’ 실업상태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고, 또 일부는 이미 ‘절대적이거나 상대적인’ 빈곤 상태에 머물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빈곤율은 얼마나 될까? 통계적으로 빈곤율을 측정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전체 가구에서 빈곤선(poverty line) 이하의 가구비율을 추정하는 ‘절대빈곤율’, 그리고 다른 사회구성원들과의 생활 수준을 비교해 측정된 결과를 나타내는 ‘상대빈곤율’이 그것이다.KDI의 연구 보고서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절대빈곤율(2000년 빈곤선 기준)은 1980년대와 90년대 초반까지의 빠른 성장에 힘입어 외환위기 직전인 1996년에는 거의 7% 초반까지 하락했다. 이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16%까지 상승하였다가 현재까지 약 9%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나라 10가구 가운데 1가구는 가처분 소득이 최저 생계비에 못 미치는 절대 빈곤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다.상대빈곤율은 1982년 이후 약 10년간 계속 감소하다가 1993년부터 다시 증가하여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에 12.8%로 가장 높았다. 이후 2000년에 잠시 줄어들었다가 계속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한 가지 특징이 있다면, 2000년 이후 최근까지 소득불평등지수(지니 계수)의 증가보다 상대빈곤율의 증가가 더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최근 발표된 통계청 자료에서도 상대빈곤율의 상승 추세는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2009년도 전국가구 가처분 소득을 기준으로 한 ‘상대적 빈곤율’은 15.2%로, 전년 대비 0.2% 포인트가 증가했다. 우리 국민들 중 약 15%가 중산층 소득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생활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뜻이다. (상대적 빈곤율은 중위 소득의 50% 미만인 저소득 계층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임)특기할만한 것은, 고학력층과 맞벌이 부부의 빈곤층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현대 경제연구원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분배 구조 악화로 소득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면서 중산층의 비율이 67.4%(1985년)에서 62.7%(2007년)으로 감소했으며 더 나아가 고학력층까지도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산층이 무너지고 있다’는 증거다.이뿐만이 아니다. 2009년 9월에 발표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전체 30개 회원국 가운데 65세 이상 고령 인구의 소득 빈곤율이 가장 높은 나라가 한국(45.1%)으로 나타났다. OECD 평균(13.3%)의 무려 3.4배가 넘는 수치다. OECD국가 중 자살률 1위, 지난 20년간 자살률 5배 증가 등 가히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노인자살률 수치는 지금 우리 사회가 얼마나 ‘척박한’ 환경에 처해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말해주고 있다.이제 빈곤의 문제는 ‘소득 재분배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일차원적인 접근방식으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제레미 시브룩(Jeremy Seabrook)의 표현을 빌자면, ‘가난한 이들은 부자들과 다른 문화 속에 살지 않으며, 돈이 있는 이들에게 이롭게 만들어진 바로 그 세계에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은 ‘경제 성장이 없으면 절대적 빈곤 또는 상대적 불평등을 완화하기 어렵다’는 주장(성장이 곧 답이다)을 펴기도 하지만, ‘같은 성장률 하에서도 빈곤감소의 정도는 국가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 지금까지 연구 검토된 결과다. 소득불평등지수가 높은 나라에서는 성장으로부터 빈곤층이 얻는 이득이 작기 때문에 빈곤 감소효과가 크지 않다는 것이다.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인류 역사와 더불어 늘, 언제나 우리 곁에 존재해왔던 이 ‘무거운 주제’ 앞에 명쾌한 해답이 있을 리 없다. 계획과 통제의 벽돌로 쌓아 올린 ‘도덕 경제’는 몰락했고, 완전 고용의 이상을 쫓던 ‘복지국가’의 꿈은 빛을 바래가고 있다. 포스트 모던사회는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을 만나,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있는 중이다. 우리들 모두는 ‘현재 빈곤한 상태에 머물고 있는 자’와 ‘곧 빈곤한 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높은 자’의 경계가 불분명한, 두렵고도 무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바우만 교수의 지적대로, 현재 우리들 삶의 양식을 둘러싸고 있는 ‘신성불가침의 가설들을 포기하는 것’이 문제를 푸는 첫 단추일지 모른다. 예를 들면, ‘효율성은 무엇에 이바지하는가, 효율은 부작용(인간의 고통)이 무엇이건 무조건적으로 좋은 것인가, 통계적으로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로 여겨지는 것(성장 이데올로기)은 그 자체로 옳은 것인가, 만일 성장이 인간의 삶과 인류가 함께 공유하고 있는 환경인 자연에 해가 된다면 중단해야 하는 것 아닌가’ 와 같은 문제제기가 필요하다는 말이다.우리는 지금 ‘신자유주의와 소비자사회’라는 두 개의 엔진으로 작동되는 ‘거대한 배’를 타고 암초가 곳곳에 숨겨져 있는 어둠의 바다를, 빠른 속도로 항해하고 있다. 이 항해는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중도에 연료가 바닥난다면 배는 멈추어 설 것이고, 우리는 ‘빈곤의 바다’ 위에 버려질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빈곤이란 단지 물질적 부의 결핍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가족의 해체와 유대감의 단절, 심리적 박탈감과 미래 전망의 부재 등 훨씬 복잡하고 심각한 내용의 빈곤을 의미한다.그러므로 문제의 해법은, ‘빈곤의 경제’가 아니라 ‘경제의 빈곤’에서 구해야 한다.국민경제 안에서 ‘빈곤의 경제’란 국민이 먹고 살 수 있는 만큼의 부를 생산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며, ‘경제의 빈곤’이란 이미 전체 인구가 먹고 살고 있는 충분한 생산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문제로 인해 상당수의 사람들이 가난을 면치 못하는 상태에 머물고 있음을 뜻한다. 두 가지는 비슷하기는커녕 확연히 다르다.빈곤의 경제는 사회 최하층에 속한 자들의 가난을 ‘어쩔 수 없는’ 운명으로 바라본다. 따라서 ‘그들에게 어느 만큼의 자선과 복지를 베풀 것인가’의 문제에서 해답을 찾으려 한다. 반면, 경제의 빈곤은 지금 작동중인 경제 시스템의 본질로 파고 들어가, 문제점을 진단하고 새로운 해법과 대안을 만들 것을 요구한다. 인간과 사회, 그리고 그 운영원리로서의 제도를 총체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고자 한다.그리고 지금 우리는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조소(嘲笑)가 상징하듯, 철저한 ‘승자독식의 사회’ 안에서 ‘경제의 빈곤’을 겪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이 기사는 4.22일자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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