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대구의 오늘은 슬프다. 옹근 50년 전 대구와 견줄 때면 하릴없이 비애가 몰려온다. 1960년 2월28일. 꼭 반세기 전이다. 대구의 경북고, 대구고, 대구사대부고, 경북여고 학생 2,000명이 당찬 걸음으로 대구 시내로 나섰다. 시청 앞으로 행진했다. 고등학생들은 외쳤다. “학원의 자유를 달라” “일요등교 웬 말이냐.” 당시 이승만 독재정권은 대구에서 열린 야당 후보의 선거유세에 사람이 모이는 걸 막기 위해 고등학생들에게 일요일인 데도 학교에 나오라고 지시했다. 이승만 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그 시절 10대들은 정면으로 저항하고 나섰다. 한국 민주주의의 신호탄 대구 10대들의 시위 물론, 경찰은 보고만 있지 않았다. 시위에 나선 고등학생 250여명을 줄줄이 연행했다. 부상당한 학생도 속출했다. ‘경북고등학교 학생일동’ 이름으로 이날 발표된 결의문은 들머리에서 곧장 “인류 역사에 이런 강압적이고 횡포한 처사가 있었던가?”라고 물었다. 이어 “오늘은 바야흐로 주위의 공장연기를 날리지 않고, 6일 동안 갖가지 삶에 허덕이다 쌓이고 쌓인 피로를 풀 날이요, 내일의 삶을 위해, 투쟁을 위해 그 정리를 하는 신성한 휴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하루의 휴일마저 빼앗길 운명에 처해있다”고 선언했다. 대구 고등학생들의 거리행진은 전국의 10대 학생들은 물론, 민주 시민들이 독재 권력에 저항하고 나서는 신호탄이었다. 무릇 역사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다. 흔히 말하듯이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 새롭게 전개되는 역사적 현재에서 미처 몰랐던 과거의 ‘씨앗’을 발견할 수 있을 때, 그 말을 실감할 수 있다. 1960년 사월혁명을 10대 학생들이 불 지폈다는 사실은 2008년 촛불항쟁과 견줄 대목이다. 더구나 그 계기가 학생들에게 일요일을 뺏은 이승만 정권의 억압이었다는 사실도 2008년 촛불항쟁과 닮았다. 촛불항쟁의 주된 계기는 광우병 위험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를 전면 수입하는 굴욕적 협상이었지만, 그것을 촉발한 지점은 다른 데 있었다. 2008년 4월에 이명박 정부는 중고등학교에 경쟁과 규율을 더 강화하겠다고 나섰다. 촛불을 들고 나선 고등학생들이 ‘미친 교육’에 항의한 사실도 사월혁명 출발점 때 외친 “일요 등교 웬 말이냐”와 어금지금하다. 대구 10대들과 닮았던 2008년 촛불항쟁의 10대들 그래서다. 1960년 경북고 학생들의 결의문이 촛불을 언급하는 대목은 흥미롭다. 결의문은 “우리 백만 학도는 지금 이 시각에도 타골의 시를 잊지 않고 있다”고 밝힌 뒤 시한 구절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썼다. “그 촛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사월혁명은 그렇게 여울여울 타오르기 시작했다. 대구 10대 청소년들의 불길을 이어받은 곳은 마산이었다. 새삼 옹근 50년 전을 떠올리는 까닭은, 사월혁명의 출발점이던 그 자랑스러운 역사 앞에 슬픈 까닭은, 오늘의 대구와 너무 대비되어서다. 시민들의 비판의식이 강해 ‘야도’라고 불렸던 대구가 50년이 지난 오늘 민주주의와 가장 거리가 먼 정치세력의 아성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침 경북대 노동일 총장도 2.28 50돌 기념강연에서 ‘민주주의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했다. 옳은 말이다. 다만 대구 시민들에게 옷깃을 여미며 정중하게 묻고 싶다. 왜 민주주의의 ‘출발점’이 지금은 민주주의의 ‘역행점’이 되어 있는가를. 그 역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옳은가를.손석춘 2020gil@hanmail.net* 이 글은 ’손석춘의 새로운 사회’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블로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