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의 힘은 어디까지일까. 과대평가할 일도, 과소평가할 일도 아니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중요하다.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 비자금을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과 함께 낱낱이 고발할 때, 이건희 회장이 그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을까 궁금했다. 결국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이건희 회장은 감옥 한 번 들어가지 않은 채 사면까지 챙겼다. 김 변호사가 최근 출간한 책 <삼성을 생각한다>도 언론으로부터 외면 받고 있다. 저자나 출판사 모두 기사를 기대하지는 않았을 터다. 문제는 신문시장을 독과점한 신문사들이 돈을 내고 광고를 하겠다는 데 그조차 이런저런 이유로 거부한다는 데 있다. 아직 그 책을 읽지는 않았다. 다만 <한겨레21> 정혁준 기사가 책 출간을 앞두고 김 변호사와 나눈 기사만 읽었을 뿐이다. 기사를 읽던 내 눈길을 단숨에 끈 대목이 있다. “생일날에도 이 전 회장은 달랐다. 손님들에겐 냉동 푸아그라(거위 간 요리)가 나왔으나, 이 전 회장 부부에게는 냉장 푸아그라가 나오더라. 이 전 회장은 1천만원 짜리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이 전 회장 집에 1층과 지하를 연결하는 엘리베이터가 있어 놀라웠다. 장롱은 유명 명인이 만들었고, 어떤 방에는 골프채가 그득했다.” 1천만원짜리 술, 거위 간 요리와 먹는 이건희 ‘거위 간 요리’는 짐작이 잘 가지 않는다. ‘와인’은 다르다. 1천만 원짜리 술을 마시는 이건희의 모습이 떠올랐다. 실소를 참으려 그냥 넘어갔다. 기실 대자본가의 과시적 행태가 결코 새삼스런 일은 아니잖은가. 애써 잊으려했다. 미국의 자본가들도 19세기에 100달러짜리 지폐로 담배를 말아 피우지 않았던가. 하지만 최근 출간된 <삼성반도체와 백혈병> 책을 읽으면서 나는 끝내 분노를 삭일 수 없었다. 시인 박일환이 반올림(반도체노동자의건강과인권지킴이,http://cafe.daum.net/samsunglabor)과 함께 쓴 그 작은 책에는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 일하다 스물 세 살의 나이에 핏빛 한을 남기고 숨진 황유미의 삶과 죽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반올림에 따르면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이나 림프종 등에 걸려 사망하거나 투병 중인 노동자들이 20명이 넘는다. 황유미도 그 가운데 하나다. 황유미가 치료받고 있을 때 삼성반도체는 강원도 속초에서 택시를 모는 아버지 황상기씨를 만나 “사표를 내면 (병원비를) 다 물어 주겠다”고 약속했단다. 하지만 정작 사표를 내자 태도가 바뀌었다. 현금 500만 원을 들고 와서 “이것밖에 없으니 이것으로 끝내자”고 했다. 당시 병원비는 8000만 원이었고, 사내모금으로 4000만 원은 그 이전에 받았다. 병원비를 “다 물어 주겠다”던 약속과 달리 500만원만 달랑 내미는 모습을 어떻게 보아야 옳은가. 물론, 생전의 고인과 가족이 요구한 산재처리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던 황유미의 피맺힌 죽음 모든 선입견을 버리고 사실만 주목해보자.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던 스물 세 살의 여직원(여성 노동자)이 병으로 숨졌다. 고인이 일하던 일터에서 발암물질이 발견됐다. 같은 병으로 죽거나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이 줄 서 있다. 그럼에도 삼성은 스물세 살에 죽은 여직원의 유족에게 약속과 달리 남은 병원비 4000만 원 가운데 겨우 500만원을 주며 “이것밖에 없다”고 했다. 조용히 묻는다. 과연 삼성이 ‘그것’밖에 없는가? 죽은 여직원의 총수 이건희는 1000만 원짜리 술을 거위 간 요리와 함께 즐긴다. 과연 우리가 지금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가? 과연 지금이 21세기 민주주의 사회인가? 문득 저 조선시대 <춘향전>의 이몽룡 시 첫 구절이 떠오른다. 金樽美酒千人血 玉盤佳肴萬姓膏 손석춘 2020gil@hanmail.net* 이 글은 ’손석춘의 새로운 사회’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블로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