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무개 방송에서 방영하는 월, 화 TV 드라마 제중원을 보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우리 병원은 밤 11시까지 진료를 하는데 그것을 할 때면 다른 동료 의사에게 진료를 부탁해야 한다. 물론 그 동료에게 엄청난 로비를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 알렌의 모습(세브란스의학박물관 제공) 조선 말엽, 의사이자 선교사인 알렌이라는 서양 사람이 우여곡절 끝에 고종의 신임을 얻어 우리나라 최초의 왕립병원을 세우게 되는데 거기에서 일하게 된 조선인(극중 이름은 ‘소근개’)이 있다. 그는 백정의 아들이고, 그 역시 백정이지만 나중에 알렌에게 조수로 발탁되어 일하게 된다.알렌과 백정의 대화알렌은 그에게 의사가 되기 위해 어떤 마음가짐이 있어야 하는지 묻는다. # 장면 1 (총상을 입은 소근개를 치료하려는 알렌과의 대화)소근개 : 저는 돈이 한 푼도 없어서 치료를 못 받겠습니다.알렌 : 의사는 어떤 경우에도 치료를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이 돈이 없어도, 지위가 낮아도 말입니다. # 장면 2 (알렌의 조수가 되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소근개와의 대화)알렌 : 당신 앞에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이 찾아오면 누구 먼저 치료해야 하나요?소근개 : 더 아픈 사람부터 치료해야 합니다.알렌 :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찾아오면 어떻게 해야 하죠?소근개 : 그 또한 더 아픈 사람부터 치료해야 합니다.나는 이런 대화를 보다가 갑자기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돌아봤더니 별로 알렌이 원하는 의사가 못 되었기 때문이다. 나를 필요로 하는 경우에도 피곤하다는 핑계로 무시한 적도 있고, 지저분한 사람이 오면 괜히 인상 찌푸리기도 했다. 반대로, 있어 보이는 사람에게는 한 마디라도 더 해주고, 친절한 척 하기도 했다. 많은 경우에 환자의 처지 보다는 병원의 수익 증대를 먼저 앞세우기도 했다.의사의 길 ▲ 우리나라 최초의 의과대학 졸업생들. 오른쪽 가운데 줄 팔짱 낀 인물이 실제 제중원의 주인공이다. 실제 이름은 박서양. 극중 역할은 조금 다르게 나오지만 백정의 자식으로 의사가 되고, 일제강점기 때는 나중에는 만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을 한다. 제중원이라는 드라마는 이전의 현대식 의학 드라마와는 다른 차원의 것들을 보여준다. 정말 소중한 인술의 길이라든지, 생명을 다루는 데에는 생명 그 자체를 봐야지, 그 사람의 배경을 보는 게 아니라는 것 등 가슴에 와 닿는 이야기들이 많다.우리나라 서양의학의 역사는 제중원 이후 100년도 훨씬 지났다. 하지만 제중원의 의미가 점점 퇴색되고, 왜곡되어 우리나라 의료는 그 공적인 뜻을 망각한 채 오늘날까지 흘러오게 된다. 지금도 영리병원을 꿈꾼다든지, 정부는 재정 확보도 안 하면서 공공의료를 읊조리기만 한다든지 말이다. 나를 비롯해서 오늘날의 의사들을 탓하고 싶지 않다. 나도 그들 속에 있지만 우리 의사들은 지난 100여 년의 시간 동안 어느 시기에도 공적의료, 공공을 위한 의료라는 것을 배워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놀라지 마시라. 일제강점기, 미군정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의사들에게 의료는 개인의 역할이지 공공의 것이 아니었다.어려운 이웃들을 돕게 된 것은 다만 시혜와 봉사의 차원에서 사회와 교감했을 뿐이다. 국가가, 의사단체가 나서서 공적의료를 내세운 적은 한 번도 없다. (1977년의 국민건강보험이 있기는 하다.) 돈에 상관없이 의사는 환자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더 아픈 사람부터 치료해야 한다.이러한 알렌과의 대화는 요즘 나태해져가는 내 가슴을 때리고 갔다. 많은 의료인들이, 정치인들이 보고 배웠으면 하는 드라마라서 여기에 소개해 본다.고병수 bj97100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