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한 사람 바보 만드는 곳. 대한민국에 있다. <조선일보> 김대중칼럼은 그곳을 법과대학으로 소개한다(2010년 1월 25일자). “대학 초년생 시절, 민법을 가르쳤던 김증한 교수가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법과대학이란 똑똑한 아이들 데려다가 바보 만들어 내보내는 곳’이라고.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성적 좋은 학생들 뽑아다가 판·검사 만드는 학교라서 그렇게 입학경쟁이 치열한데 그것을 ‘바보 만드는 곳’이라니, 교수의 말장난이 너무 심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교수가 왜 그런 표현을 썼는지 어렴풋이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김 교수는 대학에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고시공부에 돌입하면서 학교수업은 뒷전이고 절이나 고향집(당시는 고시촌이 없었다)에 처박혀 육법전서와 씨름하는 학생들이 인문교육과 세상 물정에 소홀한 것을 지적한 것이다. 세상의 이치와 삶의 가치, 교양과 상식. 이런 것들을 외면하고 오로지 출세를 향해 매진하는 젊은이, 고등고시를 인생의 유일한 지름길로 여기는 학생들이 결국 인간적으로 불완전한, 공부만 잘하면 만사가 형통이라는 오류에 빠진 외골수 인간으로 자라는 것을 경계했던 것이다.” 그렇다. 나는 김대중의 진단에 모두 동의한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김증한 교수의 우려에 동의한다. 대학에 들어가 고시공부만 하다가 판사가 된 사람들의 문제를 오래전 나 자신도 <경향신문>에 쓴 바 있다.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의 물구나무 선 바보론 하지만 <조선일보> 고문 김대중이 그렇게 말하는 근거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가 결국 ‘바보’로 규정하는 판사들은 “최근 강기갑 무죄, PD수첩 무죄 등 일련의 ‘편향적 판결’을” 한 법조인들이다. 참 기막힌 물구나무다. 대한민국 사법부가 숱한 세월동안 ‘권력의 시녀’로 저질러 온 ‘판결’에 대해 ‘바보’론을 펴는 게 아니라, 그 오욕을 벗어나려는 참신한 법관들을 일러 ‘바보’라고 손가락질 한다. 같은 날 <조선일보> 사설은 우리법연구회 해체를 다시 부르댄다. 희극이다. 우리법연구회 해체를 번갈아가며 ‘임무 교대’하듯 주장해온 <조선일보><동아일보><중앙일보>의 논리가 지닌 허구성을 스스로 드러낸 사설이 있다. “10년 이상 판사가 좋은 판결의 충분조건 안 된다”제하의 <동아일보> 사설(2010년 1월 25일자)이 그것이다. 사설은 민주노동당 강기갑 대표의 국회폭력, 전교조의 시국선언, MBC ‘PD수첩’의 광우병 왜곡보도에 무죄를 선고한 3명의 판사”를 비판하면서 “이들 판사 3명은 요즘 논란의 중심에 있는 법원 내 사조직인 우리법연구회 소속은 아니다”라고 쓴다. 그렇다. 우리법연구회가 아닌 판사들의 판결을 비난하면서 우리법연구회의 해체를 살천스레 선동하는 작태는 명백한 마녀사냥이다. 하지만 <동아일보> 사설은 곧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법연구회가 이번 파장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우리법연구회 소속 판사는 전체의 5% 남짓인 120여 명이지만 이들의 진보적인 재판 활동이 다른 젊은 판사들의 판결 성향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고 법조계에선 보고 있다. 문제의 소지가 있는 판사들이 더 폭넓게 퍼져 있음을 나타내준다.” 과연 대한민국의판사들이 휩쓸리는 바보들일까? 어떤가. 대체 이들은 대한민국 판사들을 모두 바보로 보는 걸까? 우리법연구회에 휩쓸리는 사람으로 보는 걸까. 세 판사가 우리법연구회 소속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법연구회를 겨냥해 마녀 사냥하는 저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명토박아 말한다. 똑똑한 사람을 데려가 바보로 만드는 곳, 바로 <조선일보><동아일보><중앙일보>다. 젊은 기자 시절에 날카로운 글을 썼던 기자가 고위간부가 되어 말살에 쇠살로 쓰는 칼럼을 보면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다. 법대를 나와 세 신문사에 들어가고 그 속에서 고위간부가 된 사람들은 바보가 되는 ‘완벽한 과정’을 거쳤다고 보아야 옳을까?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만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손석춘 2020gil@hanmail.net* 이 글은 ’손석춘의 새로운 사회’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블로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