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새해 벽두부터 폭설이 내렸다. 눈 온 량을 재기 시작한 이후 가장 많이 쌓였다. 사실상 100년만의 폭설이다. 서울 전체가 교통이 마비됐다. 그래서다. “새벽부터 내린 폭설로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일대 출근길이 아수라장처럼 변했다”고 <조선일보> 사설도 들머리에서 적시했다. “승용차로 20분, 30분 걸리던 서울 시내 통근시간이 2시간, 3시간 걸리는 게 예사였고, 분당에서 출발한 버스는 5시간 만에 광화문에 도착하기도 했다”. 그런데 참 생게망게하다. <조선일보>는 100년만의 폭설 앞에서 국가의 대처 방식을 비판한 뒤 곧장 “국민 수준”을 들먹인다. “폭설을 겪으면서 느낀 국가 수준, 국민 수준”제하의 사설 마지막을 보자. “재난을 겪으면서 국가의 수준, 국민 수준이 드러나는 법이다. 4일 벌어진 일들은 우리가 선진국으로 가는 길에 준비하고 대비할 일이 아직 많다는 것을 보여줬다.”폭설을 겪으면서 ‘보수 세력’이 느낀 수준 물론, 그렇게 주장할 수도 있다. <조선일보> 사설에 넘쳐나는 색깔공세는 이 신문의 주장을 새삼 비판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되짚어보게도 한다. 하지만 <조선일보>의 사설이 대한민국의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일반적 논리라는 데 주목한다면 그냥 지나칠 문제는 아니다. 더구나 폭설과 칼바람으로 하루 내내 몸과 마음이 불편했을 대다수 국민 앞에 “국민 수준”을 들먹이는 저들의 훈계는 참기 어렵다. <조선일보>가 국민 수준을 개탄하는 근거를 보자. “지하철이 환승역마다 밀려드는 인파 때문에 기능이 마비되고 곳곳에서 고장 난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대목이다. <조선일보>는 미국을 보기로 들어 우리 국민을 나무란다. “미국 동부지역에 작년 12월 18일부터 폭설이 내렸을 때 방송사들은 워싱턴DC 시장을 방송에 출연시켜 ‘꼭 외출해야 할 상황이 아니면 집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호소를 하게 했다”고 쓴다. 어떤가. 출근에 늦지 않으려고 지하철 앞에서 아우성쳐야 하는 서울의 풍경과 ‘꼭 외출해야 할 상황이 아니면 집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워싱턴DC의 상황을 우리가 같은 맥락에서 비교할 수 있는가. 폭설로 고통 받고 저들에게 꾸지람 받아야 할까 흔히 외국에 유학을 다녀오거나 외국 물을 먹은 이 가운데 한국인의 일상을 비아냥거리는 윤똑똑이들이 있다. 어김없이 국민 수준을 꺼낸다. 그들에게 묻고 싶다. 과연 한국인들이 삶에서 여유를 찾을 수 있을만한 사회경제구조가 갖춰져 있는가. ‘노동시장의 유연화’라는 사뭇 부드러운 언사 아래 얼마나 노동 강도가 강화되었는가. 손전화 문자로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해고통지를 날리는 나라에서 지하철을 서로 타려는 사람들에게만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조선일보> 사설에는 높은 지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도 전혀 찾을 수 없다. 폭설이 내려 버스도 오가지 못하는 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국민 수준’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다. 나는 이 나라의 보수를 대변한다는 <조선일보>가 진정 국가를 생각한다면 “국민의 수준”을 거론하기 전에 자신의 수준부터 성찰하길 권한다. 기실 <조선일보>만이 아니다. 새해 국정연설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오늘 출근길에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만, 하얀 눈이 온 세상을 뒤덮는 것을 보니 새해의 시작을 축복하는 듯하다”고 말했다. 과연 100년만의 폭설이 “새해의 시작을 축복”하는 걸까. “친서민 대통령”과 서민 사이에 놓인 깊은 심연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지점이다. 삶에 여유를 찾을 수 있는 경제 정책이 선행 과제인데도 정반대로 나가며 폭설 앞에 축복을 운운하고 있는 모습을 우리 어떻게 보아야 옳은가. 손석춘 2020gil@hanmail.net* 이 글은 ‘손석춘의 새로운 사회’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블로그 바로가기)